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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상처에게 선물을(11) / 강물에 띄운 편지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8년 09월 17일
11. 강물에 띄운 편지


졸업 때가 되니 교실은 더 할 나위 없이 지저분했다. 장래 희망 난의 게시물이 찢긴 채 펄럭거렸다. 설희는 오도카니 놓여있는 실내화 한 짝을 망연히 바라본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삼킬 듯 달려들었다. 바닥을 쓸고 책상 정리를 하고 나자 교실은 다시 정적에 묻힌다. 창밖 풍경은 하얀 적막이다. 어젯밤 꾼 꿈의 환영이 교정의 눈길 위에 펼쳐졌다. 사슴 한 마리가 눈 위에 쓰러져 있었고,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눈을 점점이 파먹으며 온통 피바다였다, 몸서리치며 깼을 때 새벽 4시,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GBN 경북방송

“백설희, 오래 기다렸지.”

김성한이 들고 있던 편지 봉투로 설희의 머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세상에 어떤 선생이 학생의 연애편지를 전해 주겠냐?”

설희는 편지봉투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다. 하얀 봉투가 미세하게 떨렸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등에 채찍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남자들 다 도둑놈들이야, 인마. 상처받지 말고 툴툴 털어 버려라.”

설희는 담임의 말이 심장에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아 걸음을 멈췄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담임에게 속 시원히 고민을 털어 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어른으로 취급해주고 믿어준 선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 비밀을 고백할 뻔했다 싶어 설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편지가 오다니. 이미 기차는 떠나버렸는데. 물은 엎질러졌는데. 만신창이 되었는데.’
설희는 호두나무 벤치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그 위에 책가방을 놓고 편지봉투를 뜯었다.

―간밤에 눈이 왔어. 널 생각하면 고슴도치 같던 고딩이 시절이 떠오른다. 곧 졸업이지? 할 말이 있다. 꼭 만나자.

구름 덮인 하늘이 아득했다. 가슴이 아리고 쓰라렸다. 눈앞에 펼쳐진 순백의 빛에 별안간 적의가 끓어올랐다.

‘백설희라니, 나더러 백설처럼 순결한 여자가 되라니, 체, 대체 엄마는 순결이 뭔데 내게 이런 이름을 지어줬을까. 눈이란 게 어떤 거냐고. 하늘에서 떨어질 때는 좋았지. 금방 녹아버리고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질퍽거리게 되는 걸 몰라? 하얗게 가려주고 덮어주는 눈이 좋을라치면 제 본질을 드러내고 질펀하게 웃고 사라져버리는 눈, 눈은 다른 외부환경의 침입에 속수무책 무방비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순결은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이다.’
ⓒ GBN 경북방송

설희는 편지를 가방에 넣고 교정의 내리막을 내려갔다. 교문 앞에 지예가, 고개를 숙이고 제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예는 일 등으로 입학한 탁월한 학생이었지만 불운하고 가난했다. 중학교 일학년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버지는 다섯 아이를 기를 수 없어서 바로 재혼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철딱서니 없는 남동생 넷을 지예에게 맡겨두고 늘 객지로 떠돌아다녔다. 한 달에 한두 번 와서 쥐꼬리만 한 생활비를 주고 가버리면 지예는 네 남동생의 엄마가 되어 가사를 맡았다. 그러면서도 전교 일 등을 놓치지 않았다. 공부라고는 아예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일 학년 어느 수학 시간, 젖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지예의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 지예를 생각하기만 해도 설희는 목이 메었다. 그때부터 설희는 지예 곁을 맴돌았고 결국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동안 지예와 떨어져, 혼자만 선로에서 이탈해버렸다는 생각에 설희는 가슴이 아리었다.

“지예야!”

“뭐야!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 무슨 일 있었어?”

“어, 천지개벽할 일이 있었어.”

설희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일반 반인 지예의 보충수업이 끝나면 만나곤 했다. 하지만 둘은 만나지 못한 지 꽤 오래였다.

“어디 돌아다니는 거야. 너 만나려고 몇 번 도서관 갔는데…….”

“미안, 집에 가서 얘기해.”

“그래, 오늘 김장하는데 좀 도와줄래?”

“우와, 김장도 할 줄 알아?”

둘은 조잘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눈이 녹아 질퍽한 도로를 달리는 차바퀴 소리가 자작자작 들려온다. 점점 건물이 낮아지고 논밭이 황량하게 펼쳐진다. 버스는 수정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교각 아래의 강바닥은 물이 말라 자갈 바닥이 휑하게 드러나 있다. 억새와 마른 풀들이 거뭇하게 혹은 얼룩덜룩하게 본래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천변의 풍경이 서글퍼 보였다. 설희가 사는 동네의 복닥거리는 골목과는 사뭇 달랐다.

방 두 개의 셋방에 지예의 가난한 살림이 빼곡히 들이차 있었다. 서랍장에 위에 올려둔 조화 꽂힌 화병과 남동생과 찍은 사진틀과 벽시계가 놓인 방은 어떤 그림을 연상시켰다.

‘어떤 화가였지? 방을 그린 그, 마네도 아니고 누구였지?’
설희는 그 화가의 이름을 늘 잊어버리고는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변명했다.

‘어렵지도 않은 데 말이야. 맞다, 앙리 마티스야.’

설희는 마티스가 그린 <빨간 실내> 떠올리다가 <빨간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를 생각했다. 벽과 바닥이 온통 빨간 방, 침대 위에 오달리스크가 누워 있었다. 빨간 바지를 입고 상의를 벗었는데 유방과 배꼽을 내놓고, 발목에서 삼각형으로 하체를 모으고, 팔베개를 하고, 반듯이, 나태하게 누운 여자의 방, 그가 그린 방은 화려했다.
오달리스크 시리즈를 그리기 위해 6년 동안 매달린 마티스는 모로코의 직물, 카펫, 소품으로 아뜨리에를 하렘 풍으로 꾸몄다. 그토록 애착을 가진 누드화의 오달리스크는 마티스에게 어떤 존재일까. 한 여인의 존재가 위대한 화가를 사로잡은 근원은 무엇일까. 설희는 언니 진희가 애지중지하는 세계의 명화 전집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오달리스크라는 말은 술탄의 하렘에 사는 첩을 나타내는 터키어가 프랑스에 와서 관능적인 누드화의 여인을 지칭하는 말로 와전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티스의 빨강은 관능을 무르익게 하는 배경인 셈이다. 결국, 관능이란 말, 흥! 설희는 두 남자 선재와 원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딥 키스에 꼼짝달싹하지 못했던 자신도 관능에 몸을 맡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과수원에서 스스로 성을 받아들인 관능이 오달리스크와 무엇이 다를까. 설희는 갑자기 몸을 떨며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벌레를 떠올렸다.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기어 나오는 것 같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달리스크가 누운 붉은 방이 혈흔으로 칠갑되어 보였다가 서서히 주홍빛으로, 노란 빛으로 바뀌면서 시골 사랑방 같은 지예의 소박한 방이 설희의 눈앞으로 되돌아왔다. 설희는 눈을 껌뻑이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예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설희도 지예가 주는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절여놓은 김장배추에 양념을 묻혔다. 고춧가루 양념을 옷에 묻혀가며 처음으로 김장을 하니 스스로 장한 생각이 들었다. 설희의 얼굴빛이 환해진다. 김장 설거지를 끝낸 설희와 지예는 아랫목에 앉아 몸을 녹였다. 하아, 행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예야, 편지 왔어.”

  “어머, 그 사람에게?”

지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모았다.
“정말 잘 됐어. 어디 편지 좀 보여줘 봐.”
설희는 가방에 든 편지를 찾아 내밀었다.
지예가 언니처럼 나무랐다.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니? 이제 잘 될 것 같은데.”
설희는 더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머리를 가로저었다.

“다 끝나버렸어.”
 “왜 그래?”
 “내가 어떤 짓을 했어도 나 친구로 생각할 거니?”
 “당연하지.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너도 그렇지?”

  설희는 울먹였다. 끔찍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지예는 담담했다. 다 듣고 난 지예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안 만나겠다는 거야?
 설희는 고개를 끄떡였다.

“무슨 상관이야, 그 입만 잘 꿰매고 있음 돼”
 지예의 말꼬리에 힘이 실렸다.
“아니, 말해버릴 거야.”
지예는 설희의 어깨를 감싸주고는 커피를 타 왔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설희의 한숨소리와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들렸다. 
“『테스』읽어봤니?”
커피 잔을 입에서 떼며 지예가 물었다.
“다시 읽고 있어.”
“그걸 왜 또 읽어?”
“주인공 테스를 이해하기 힘들어.”
“그러게.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넌 영원한 사랑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설희야,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너무 슬프잖아. 있다고 믿고 싶어.”
“영원할 수 없으니까 사랑이 사람들의 영원한 화두가 되는 거야. 나는 사랑 따위 무시할 거야. 연애에 쏟는 노력과 에너지로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겠어.”
“그래도 모든 가치 있는 인간사의 귀결점은 사랑이잖아. 사랑장이라는 그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에도 씌어 있잖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간의 모든 활동은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되거든.”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야. 혹시 네가 테스 흉내 낼까봐 하는 소린데.”
“내가 테스처럼 살인이라도 할까 봐? 진부하다.”
“테스도 진부하지만, 남자들은 대개가 더 진부한 동물이란 걸 알아야 해.”
“복수하고 싶으니까 그럼 나도 진부한 거네.”
“진부한지 안 한지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해보자.”

설희는 금방 푼 밥공기를 두 손으로 잡았다. 따끈따끈했다. 하얀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지예는 엄마처럼 김장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 설희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화끈하게 매우면서 칼칼한 맛이다. 지예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호호거리며 말했다.
“맵다. 그래도 맛있지? 그지? 맛있지?”
“그래,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맛이 이런 맛이야.”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설희는 순간 행복했다. 절망 따위, 사랑 따위에 증오감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혀는 일 초 순간에 마음을 바꾼다. 오리무중, 예측불허였다. 목구멍에 매운 침이 고인다. 입안 가득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 뱉어낼 때는 눈물도 함께 나온다. 독하게 매운맛이 실연의 고통처럼 느껴진다. 설희는 침을 머금은 상태로 생각했다.
‘침을 뱉듯 뱉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설희야. 그 사람 만나.”
“싫어.”
“만나면 그 놈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 돼.”
“아니, 이미 끝났어.”
“바보같이 굴지 마. 첫 사랑을 잃을 거니?”
“내게 첫 사랑이 있기나 해? 나 혼자 일방적인 게임을 한 거야. 내리막 비탈길을 치달을 때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어. 복수할 거야. 다 말해줄 거야. 그리고 다시는 내 이름을 거론하지 않게 진저리치게 해줄 거야.”
“너, 꼭 테스처럼 구는구나. 테스는 그래도 너보다 운이 좋았어.”
“맞아. 알렉에게 유혹을 당한 테스가 배신당한 후 목사의 아들 엔젤과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 좋았던 거지. 엔젤이 떠나고 테스는 다시 알렉에게 선택받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테스의 가족을 경제적으로 구해준 이도 알렉이었잖아. 테스의 어머니가 물었을 때 알렉이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육체적인 의미에서 그 사나이, 알렉만이 남편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구절이 나오잖아. 참, 갈대 같은 마음이라니.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남편 엔젤을 사무치게 기다리다가 결국 다시 알렉에게 도움을 받고 결합했는데 엔젤이 돌아오자 알렉을 살해하다니, 그게 사랑의 증거라니. 그렇게 죽이려 했으면 애초에 알렉의 도움을 거절하고 알렉에게 돌아가지 말았어야지, 그지? 순결한 여인이라는 부제를 단 책도 있던걸. 오락가락하는 가벼운 사랑 같아 보이는데 어째서 순결이야?”
“알렉을 죽임으로써만 자기 사랑을 확인한다는 식이지. 요즘으로서는 너무 현실성이 없는 얘기지. 어쨌든 테스는 예뻐서 그런지 너보다 확실히 남자 복이 많아. 너도 예쁜데 말이야.”
“내가 예뻐?”
“그럼, 미인은 아니지만 아주 귀엽지. 설희야, 테스처럼 고백 따위 하지 말고 그 사람하고 다시 시작해.”
“싫다니까!”
“네 입만 꿰매면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어."
“난 더러워졌어.”
“목욕하면 돼.”
“육체와 영혼이 따로 노는 거, 인정할 수 없어.”
“바보야, 정신 차려! 넌 미친개에게 물린 거야. 그 놈은 네 같은 숙맥의 상대가 아니야.”
지예는 육체보다 영혼의 사랑을 붙잡으라며 설희 손을 꼭 쥐었다.

인제 와서 원우를 만나서 어쩌자는 건가. 설희는 뻗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만나고 싶었다. 원우의 절망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지예는 언니처럼, 설희를 타이르고 손가락을 걸었다.

새벽에 꿈을 꾸었다. 설희는 수정교 아래 천변으로 달려갔다. 넘실거리는 강물에 편지를 띄워 보내는데 저 멀리, 원우가 고요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설희는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었다. 원우의 몸이 완전히 가라앉자 설희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아 외마디 소리를 지르다 꿈을 깼다. <12회에 계속>




↑↑ 서유진 작가
ⓒ GBN 경북방송

소설가 서유진
대구 출생
고등학교 교사(전)
한국소설가협회, 대구소설가협회, 경주문인협회 회원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총각선생, 짱생의 하루」
소설집《하프턴》세종나눔도서 선정
웹 장편 『스무 살이 사랑한 다섯 남자』
중편 환타지「억새꽃이 피었어요」
「배반네거리」「완벽한 풍경」「과속방지턱」등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8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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