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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진 연재소설] 상처에게 선물을(12) / 마지막 밤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8년 11월 04일
12. 마지막 밤   


졸업식을 끝내고 설희는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지예는 아저씨를 만난다고 생글거리며 돌아갔다. 설희는 학급의 마지막 정리를 하러 가야 해서 엄마가 사주겠다는 자장면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터벅터벅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축하하러 온 사람들은 대개 돌아가고 화단 앞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아이들이 몇 보였다. 그때 꽃다발과 무언가를 포장한 꾸러미를 든 남자가 낭패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설희는 화단 옆으로 달아났다.
ⓒ GBN 경북방송


“백설희!”

설희는 등을 보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왜 도망가?”

“바쁜 분이 어쩐 일이죠?”

설희는 처음으로 빈정거려 보았다. 아가씨는 어쩌고요? 하려다 꿈 참고 원우의 눈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편지 못 받았어?”

“받았어요.”

“왜 안 나왔어?”

“참, 느닷없네요.”

 “야, 설희 많이 변했다?”

원우는 머리를 한 번 긁고는 꽃다발과 선물을 내밀었다.

“미안해. 그동안 일이 좀 있었어.”

설희는 꽃다발과 앨범 크기만 한 선물 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입이 붙어버렸다.

“나도 일주일 후 전역이야.”

싱글싱글 웃는 원우를 보자 마음이 아려왔다.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설희는 몸을 흠칫 떨었다. 후회로 머리를 잡아 뜯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저녁 6시에 역 대합실로 나와. 꼭이야. 할 말이 있어.”

원우는 돌아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학교 교정의 내리막을 향해 한참 내려갔을 때 설희는 원우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원우가 뒤돌아보았다. 원우는 두 손을 입에다 모아 스피커를 만들고 외쳤다.

“꼭 나올 거지!”

설희는 고개를 끄떡였다. 고개를 끄떡이는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봐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설희는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지예의 말대로 감쪽같이 숨기고 그와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는 머리 긴 아가씨와 헤어진 건가. 왜 어린 계집애가 뒤늦게 여자로 보이게 된 걸까.’

더러운 기억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우개로 싹 지우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유혹이 속살거렸다.

일찌감치 역으로 갔다. 역 광장의 시계는 6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해가 져버린 저녁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설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라면 저주에 가까운 적의를 품고 있는 설희였다. 대합실로 들어갔던 설희는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싫었다. 사람이 모인 곳에 가기만 하면 벌거숭이 몸을 보이는 것처럼 몸이 스멀거렸다. 과수원에서의 일이 언뜻언뜻 스치며 자신의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설희는 대합실을 나와 현관 앞 가로등 밑에 서서 원우를 기다렸다.
정각 6시. 원우가 뚜벅뚜벅 설희에게로 걸어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원우의 모습은 바람기가 줄줄 흐르는 선재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원우의 외모는 역시 플라타너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싱그럽게 잎을 피워 행인의 땀을 식혀주는 플라타너스의 환상을 설희에게 심어 주었다. 원우의 얼굴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러나 설희는 어둡고 심각했다. 원우 앞에서 설희는 늘 침울했다. 고통과 선망이 어린 얼굴로 깊고 암담한 멜랑콜리를 말없이 표현했었다. 초췌한 번뇌의 얼굴이 그를 바라본다.

“밤을 새도 너를 지켜줄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오늘은 너한테 오랫동안 참아왔던 이야기를 해야겠어. 나를 믿지?”

설희는 그 말이 우습게 들렸지만,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은 기차를 탔다. 도로를 따라 넓은 들녘이 펼쳐졌다. 개울을 끼고 돌자 먼 곳에 마을이 보였다. 낮은 기와지붕을 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민박집 앞에 원우는 걸음을 멈췄다. 여관이나 여인숙이라고 쓴 간판이 없었다 뿐이지 민박집은 그대로 방을 빌려주는 싸구려 여인숙이다. 그럴듯한 모텔 하나 없는 아직 환락에 물들지 않은 시골 마을 어귀, 마당에는 작은 화단이 있고 칠이 벗겨진 툇마루가 달린 서너 칸의 방이 어깨동무하고 있다. 장지문에 바른 창호지에 알전등의 엷은 빛이 은은하게 비춘다.
문을 열자 시골집 특유의 곰팡내가 물씬 풍긴다. 어둑한 방안, 불을 켜자 빈방에 이부자리가 깔려있다. 설희는 깔아놓은 요 위에 나란히 붙어있는 두 개의 베개를 바라본다. 가슴속에서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듣는다. 얌전히 인내하고 기다렸다면 그의 사랑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엄연히 사랑이었다. 그것도 첫사랑.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대체 그런 생각 자체가 말이나 되는가. 때로는 사랑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고서는 금방 마음이 변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위해 일편단심하고 싶었던 자신이었다. 극과 극을 달리하는 변덕은 또 뭐냐. 자신을 경멸하는 순간이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두 사람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설희는 머릿속이 하얘진다. 반듯하게 누워서 천장의 사각 무늬를 노려본다. 원우가 먼저 입을 뗐다.

“난 네가 졸업하기만 기다렸다. 너 입시 공부에 방해될까 봐 조심했어.”

설희는 어이가 없었지만 감미로운 유혹의 말이었다.
‘지예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입을 꿰매고 있으라고 한 걸까. 그가 그때까지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보여주었다면,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다면, 그리 방황하지 않았을 테다.’

“머리 긴 아가씨들은 어쩌고요?”

“요즘 아가씨들, 다 그렇고 그래.”

“그렇고 그렇다니요?”

“순수하지가 못해.”

설희는 속이 울렁거리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순수라니! 자신 만큼 순수할 수 있었을까. 그때 비장한 결심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일어섰다. 대뇌의 세포가 갑자기 활발히 움직인다. 팽이 돌리듯 머리를 돌린다. ‘순수’라는 단어가 깔깔대며 웃고 몸부림치며 설희에게 앙탈을 부린다. 복수의 화신이 대담하고 맹렬한 기세로 원우를 무자비하게 밟으려 한다. 체념하려면 확실히 해야 한다. 원우가 자신을, 자신이 원우를, 다시는 의식 속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차갑고 독하게 떠나보내는 마지막 밤이 되어야 한다. 설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순수라는 단어, 그 말이 비수가 된 줄 원우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순수한 여자를 좋아하는 원우에게 이제 어쩌란 말이냐. 지예 말대로 입을 꿰매고 있으라고?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타락하고 짓밟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원우의 뒤통수를 내리치려고 설희의 마음속이 분주해졌다. 그러나 일을 저지르기 전에 한 번 더 행동의 타당성을 생각해 놓아야 했다. 지예라면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체념이 마음을 점령했다. 원우가 자신을 내버려둔 데 대한 복수심에다 때를 놓친 사랑에 대한 상실감이 안타까움으로 변해 마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원망이 증오로 변해 들끓었다. 열패감 속에 스스로 내동댕이친 자존감이 음험하게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신념이라도 되는 양 코에 건 양심, 원우를 속일 수 없다는, 순수한 여자로 은폐할 수 없다는 마지막 남은 양심이 흔들리는 설희를 비웃었다. 설희는 자신에게만은 조롱당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흔들고 싶었다. 그것이 비참한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할지라도 비굴하게 원우의 애완견이 되어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원우가 설희를 향해 돌아누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자주 만날 수 있어. 어,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내 마음을.”

“이미 늦었어요.”

“설희!”

설희는 깃발을 빼 들었다. 남김없이 거짓 없이 고백하고 나니 홀가분하고 편안해졌다. 지예의 충고는 무용지물로 끝나버렸다. 탄식하는 원우의 머리가 벽에 부딪쳤다. 그리곤 신음이 잦아들었다. 방바닥을 줄곧 내려다보던 원우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아…… 아!”

설희는 원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복수의 쾌감이 끓어올랐다.

‘내가 받은 것보다 더 잔혹한 키스가 될 거야.’

자신의 영혼을 빼앗은 장본인이었다. 설희는 이제 남의 평판 따위, 아니 원우의 평판 따위 염두에도 없다. 이제야말로 자존심을 일으켜 세울 때였다.

“이제 난 예전의 설희가 아니에요.”

속으로 ‘당신이 팽개친 소녀를 보세요!’ 하고 속말을 하며 원우의 아랫도리에 머리를 파묻었다.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아! 아! 네가, 네가!”

원우는 부르짖으면서도 욕정을 참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설희의 몸을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여기까지만요. 나, 병 옮았어요.”

두 사람이 포옹한 채 긴 침묵이 흘렀다. 원우는 자꾸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남자 집 어디야?”

설희는 씨알만 한 연민이라 생각했다.

‘인제 와서 아무렴 어때.’

설희는 선재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원우의 집 근처였다. 어쩌면 서로 알고 지낼 이웃일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 원우의 아버지도 운수업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들 어떠리. 설희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던 고독이, 그 쓸쓸한 것이 푸슬푸슬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쓸쓸하지 않을 거야.’

포박에서 풀려난 영혼이 훨훨 날아오르는 듯했다. 설희는 속말을 하며 허물어지는 원우를 뚫어지게 본다.

“이제 내 자신을 더 사랑할 거예요.”

원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엎드려 얼굴을 가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설희는 이것이 원우와의 마지막 만남이리라, 생각하며 기다랗게 엎드린 원우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밤이 깊어갔다. <13회에 계속>



작가 서유진

대구 출생
고등학교 교사(전)
한국소설가협회, 대구소설가협회, 경주문인협회 회원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총각선생, 짱생의 하루」
소설집《하프턴》세종나눔도서 선정
웹 장편 『스무 살이 사랑한 다섯 남자』
중편 환타지「억새꽃이 피었어요」
「배반네거리」「완벽한 풍경」「과속방지턱」등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8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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