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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진 연재소설] 상처에게 선물을(13회) - `갈래길`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9년 01월 04일
13회 -  갈래길   

ⓒ GBN 경북방송

원우의 아버지 김 사장은 버스 대형사고로 막대한 손실을 봤다. 사상자가 많아 버스회사를 정리하고 나자 그는 우연히 폐암 3기인 사실을 알았다. 김 사장은 원우가 하나 남은 택시 회사를 운영하겠다고 1년 남은 학업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느냐.”

김 사장은 무력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원우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그저 머리를 주억거렸다. 후회 없는 선택이라고 믿어도 인생이란 늘 후회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전역을 한 원우가 복학을 하지 않겠다고 우기자 김 사장은 낭패했지만, 곧 안도하며 아들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으로 돌변했다. 서슬 퍼렇던 김 사장도 이제 늙고 병들었다. 사업이 기울고, 좁은 집으로 이사를 와서 미안한 마음이지만, 아들의 처신이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다. 얼마나 다행인가.
2차 인혁당(인민혁명당)사건에 연루되어 풀려난 친구 아들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은 후 아직도 보일 듯 말 듯 다리를 전다. 지병을 앓던 친구는 눈을 감으며 아들을 부탁했다. 그 아들이 지금 김 사장의 택시회사에서 일을 보며,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상기다. 만약 원우가 재작년 3월에 군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함께 학생 운동에 가담했을지 몰랐다. 우유부단하고 성정이 온유한 원우였기에 피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고 묵묵히 입대한 아들이 새삼 고마웠다. 그러나 정남을 생각하고는 그만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 생각을 떨칠 수 없다.
1974년 4월 9일, 유신정부는 민청학련을 인혁당과 얽어 8명의 주동자를 사형시켰다. 사형수 중 가장 어린 여정남이 고향 선배의 아들이었다. 얼마나 유망한 청년이었나.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정남은 그때 겨우 31세였는데 한줌의 흙이 되어버렸다. 운동권 학생들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상기는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상기는 정의는 살아있다고 믿으며 공부하고 있다. 이번 시험에도 신원조회에 걸릴 게 뻔하다. 하루빨리 공부를 접고 사업을 시작하라고 권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상기가 회사 사정을 잘 안다. 뭐든 의논해서 잘 처리해라.”

“네, 아버지는 건강이나 챙기세요. 회사일은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책을 못 들여놔서 어쩌나.”

“나중에 볼 책은 박스째 창고에 보관하면 돼요.”

김 사장의 쓸쓸한 눈빛이 허공에 걸려있었다. 이제는 아들을 보살필 여력이 없다. 그가 안방으로 건너갈 때 낡은 마루에서 끽끽 소리가 났다.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아직 재기의 기회가 있다고 위로하며 돌아봤다. 걱정스럽게 아버지의 행동을 주시하는 아들이 부축하려는 듯 주춤 다가섰다. 김 사장은 일없다는 듯 손을 휘젓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원우는 제 방으로 건너와 대충 이삿짐을 정리해놓고 회사서류를 꺼냈다. 내일부터 회사에 나가 아버지 대신 일해야 한다. 시급한 일이 있었다.
불법 도급 택시에 관한 서류가 따로 철해져 있다. 택시 40대 중 20대가 도급 택시였다. 도급택시 기사가 회사에 벌어주는 돈은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다. 정식 직원이 아니니 계약하는 대로 회사는 이득을 챙긴다. 나이, 자격요건, 범죄 전과를 따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기본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고, 유류, 수리비도 그들이 책임진다. 때로 사고가 나면 책임도 떠넘긴다. 완전 착취 수준이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원우는 이중장부를 보다말고 일어나 방안을 맴돌며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형편이니 외아들인 자신이 회사를 꾸려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는 위험 부담도 크고 떳떳하지 않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원우는 아버지의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원우는 마루를 나가 안방 문 앞에 서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주무세요?”

“아니다, 들어오너라.”

파리한 아버지의 얼굴빛이 푸른 조명등을 받아 더욱 창백해보였다. 원우는 불을 켜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저한테 회사 물려주신 거 맞지요.”

“그래,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냐. 네가 잘 꾸려가거라.”

“도급기사 내보내고 장부 정비하려고 해요.”

“정직하게 해서는 돈 못 벌어. 특히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얼마나 버시게요. 아버지 저한테 뭐라고 가르쳤어요. 공자가 했던 말을 기억해 보세요. 부귀란 것이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부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도를 행하고 덕을 쌓겠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던 말 잊으셨어요?”

“이상과 현실은 달라.”

“아버지도 변하셨군요.

김 사장이 핏기 없는 손을 들어 눈언저리를 비볐다. 버스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법을 어기지 않고 순리대로 사업을 해왔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버스 사고 사망자와 부상자만 해도 최대한의 위로금을 지급하느라 회사를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브로커들의 개입으로 희생자 가족들은 더 많은 보상금을 요구했다. 김 사장은 오랜 시일 시달리며 세상인심에 격분했다. 버스 회사는 다른 회사에 넘어갔고, 택시 회사를 담보로 잡았고, 집까지 팔아 겨우 급한 불을 껐다. 세상은 자신을 몰라주었고 바르게 살아온 것이 다 헛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도급 기사를 들인 지 불과 석 달이 못 되었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아들의 표정이 착잡했다. 병들고 늙고 무능해진 아버지에게 더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자제하는 눈치였다.

“좀 더 생각해보자.”

“아버지, 스무 대만 굴려도 우리 먹고 삽니다. 내일 기사들에게 통보하고 차 인수할 회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일을 그리 급히 서두르면 안 된다.”

“앞으로 업계에 도급기사가 늘어날 겁니다. 그러면 감사도 심해집니다.”

김 사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까무룩 잠이 들듯 기진했다. 스르르 이부자리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괜찮아, 좀 쉬고 싶은 게야.”

“그만 주무세요.”

원우는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의 방으로 건너왔다. 여동생의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원우는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였다. 무엇이 싫은지 싫어, 싫어, 하며 잠꼬대를 했다. 원우는 여동생이 낡고 좁은 집으로 이사 온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제 방에 들어가 이마를 감싸고 생각에 잠겼다. 곧 적응되겠지. 그는 기사 명부를 폈다. 주소와 연락처만 기록되어 있다. 이름을 훑어보다 한 이름에 시선이 멎었다.

이선재, 신화1동 124번지

설희가 말한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택시 다섯 대를 가진 차주라더니. 수첩을 열었다. 설희가 가르쳐준 주소와 같다. 명치가 뻐근해지며 가슴이 벌떡거렸다. 내일 회사에 나가면 그 놈의 상판을 만날 수 있겠지. 뒤를 캐 봐야겠다. 아니다. 그보다 더 빠른 방법은 상기 형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겠다. 12시까지 차가 들어오고 나면 새벽 5시가 되어야 교대하는 차량이 들어온다. 상기가 뒷정리를 할 시간이었다. 원우는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원우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봤다. 차가운 별빛이다. 그래도 별 하나 하나에 이름이 있고 제 힘껏 빛을 내는 중이다. 설희에게 별처럼 반짝이며 살아야 한다고 했던 여름밤이 생각났다. 그때의 별과 지금의 별은 같은 별이지만, 설희는 그날의 설희가 아니다. 그 여름밤,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설희는 자신의 여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솟구쳐 오르는 욕정을 억제하느라 힘든 밤이기도 했다.
그날 시골 여인숙에서 설희는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고통을 참는 듯 보였다. 설희는 두 손을 아랫배 가까이 모아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아랫배가 아프다고 했다. 아랫배가 아픈데 아랫배보다 아래 부분에 두 손을 모으고 엉거주춤 서 있다 쪼그려 앉기를 반복했다. 이제야 생각났다. 병이 옮겨졌다지 않았나? 그 놈이! 뜨거운 열기가 머리끝으로 몰려왔다. 원우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은 거리낌은 뭔가? 단지 키스 한 번 했을 뿐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 원우는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에 찾아온 설희를 몇 번이나 그냥 돌려보냈고,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아, 그때는 솔직히, 하며 원우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원우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아 허공에 품었다. 구름 속에서 달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었다. 보름달 같던 설희,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던 설희에게 등을 돌리고 가버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희에게 머리 긴 아가씨를 만나러 간다고 자랑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아가씨가 누구인가. 경애, 손끝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 같은 그녀는 쓰라린 추억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나는 고된 훈련으로 극한의 육체적 고통을 견뎌낼 때마다 첫사랑의 감정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경애는 민청련 간부였다. 보기에는 가냘파 보였지만 강한 리더십으로 남성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것은 오히려 성적으로 매력 있어 보였다. 경애는 담배를 피웠고, 격렬한 토론을 좋아했다. 자유와 민주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끊어지는 때가 없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어느 날 밤, 학생 회의실에 갔을 때 그는 절망적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서너 개의 매트리스 위에 시위에 지친 선후배들이 널브러진 듯 잠에 빠져있었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할 것 없이 섞여서 마치 무람없는 남매들이 한방에 오글거리는 듯했다. 책상 위에는 전단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애를 찾고 있었다. 구석 편 등사기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아, 그녀와 선배가―차마 상기 선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손을 꼭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입대했다. 일 년 반이 지나 다시 경애를 만났을 때, 여성운동가였던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상기와 경애가 수배되었고, 정남 선배가 사형당했다. 세상은 살얼음판으로 돌아갔다. 무서운 태풍이 지나가고 원우가 경애를 재회했을 때 그녀는 알파마요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 여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 카페는 버스정류장에서 불과 20미터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원우의 집에서 나와 2차선 도로를 100미터 정도가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버스정류장이었다. 경애는 자신의 카페에서 원우를 만나기를 꺼렸다. 토요일 초저녁에 시내에서 만나 두 시간 정도 함께 보내고는 9시 전에 카페로 돌아갔다. 그러다 경애는 원우를 자신의 카페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경애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녀의 가슴을 자유와 민주대신 공허가 점령했다. 원우는 첫사랑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간혹 떠오르는 경애의 남자들을 몰아내며 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원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와중에 설희 같은 계집아이는 그저 어린 여동생으로만 보였다. 경애는 예전처럼 여럿 남자 속에 파묻혀 살았다. 대마초를 피우며 세상을 한탄하고 사랑을 증오했다. 가끔 경애가 상기에 대한 소식을 물을 때, 원우는 흠칫 놀라며 동아리 실에서 손을 꼭 잡고 누워있던 선배를 떠올렸다. 상기 선배가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면서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동아리실의 광경이 그를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경애의 육체를 탐했다. 경애의 몸은 깊은 샘처럼 투신하는 남자의 영혼을 아귀처럼 먹었다. 아니 원우야말로 육체의 아귀가 되어갔다. 설희가 방황하는 동안 원우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가씨를 만나러 간다며 설희에게 자랑하며 싱글벙글 웃었던 때가 아마도 자신이 경애에게 함몰되어 가던 시초였으리라, 하며 지금에 와서 원우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원우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다. 자신은 금방 치료를 받고 나았지만, 설희는 어쩌고 있을까.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그냥 참고 있을 게 뻔하다. 그 놈을 만나야겠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놈이라면 책임을 져 줄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나설 용기는 없었다. 원우는 자신을 비호하며 이같이 말했다.

“옛말에 능히 말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능히 행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사마천이 사기열전에서 말하지 않았나.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원우는 무엇을 행할지,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기라면 이선재 그 놈에 대해서 잘 알 것이었다. 원우는 상기를 만나려고 집을 나섰다. 차고 쪽으로 가는 좁은 도로를 걸어갔다. 길도 마음도 얼어붙을 듯 추운 날씨였다.
<14회에 계속>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9년 0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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