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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일탈의 대가(5)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2월 23일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은 공허가 밀려왔다.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갔다. 원우는 설희라는 존재를 영영 잊어버린 것일까. 편지는 끊어졌다. 설희는 만날 수 없는 원우에게 더는 자신을 던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이전의 텅 비었던 심연이 잔잔하게 파도치는 바다라면, 지금은 폭풍의 바다였다. 검은 구름이 심연을 덮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의미 있던 것들이 이제는 무의미한 허접쓰레기 같다. 원우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잡초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귀엽다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는 어설픈 애무 따위 사양하고 싶었다. 결핍된 애정은 순전한 사랑을 갈망하고, 결핍, 결핍, 결핍…… 갈망, 갈망, 갈망…… 무한결핍, 무한 갈망…… 결국 운명의 신에게 고통을 반납할 때가 왔다. 남성에 대한 불신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방황의 악귀가 손을 내밀었다. 설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불쾌감과 혐오감이 스멀거렸다.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자신을 허물어뜨린 것은 그의 영혼이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키스였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키스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설희는 물기 젖은 눈자위를 손으로 비볐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소슬한 아침 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빨간 구두를 신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블라우스가 팔랑거린다. 설희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시장 뒷골목을 빠져나왔다. 육교를 건너 미국 선교사 사택이 있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학교 동산에 바로 닿는 지름길이었다. 이제 석 달만 버티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다. 석 달, 석 달만 버티자. 설희는 자신을 타이르며 교실로 들어갔다. 금방 담임이 들어왔다. KO 당한 권투선수처럼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배신이야. 얌전한 쥐였어. 완전히 속았어. 할머니를 부양하는 소녀 가장이라기에 난 믿었다. 할머니가 너무 위독해서 보살펴야 한대서 허구한 날 일찍 조퇴해 주었는데, 이럴 수가!”
김성한 선생은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화를 터뜨렸다.
“아이고, 정말 미치겠네. 미지가, 어떻게 미지가 그럴 수 있냐고. 양 같은 순한 눈으로 애처롭게 조퇴를 해달라고서 책가방에 드레스를 넣어 다니며 룸살롱에 출근했다네! 아! 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미지는 그 바닥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날 밤 학교 남선생들이 룸살롱에 갔다가 미지인 줄 모르고 환락에 굶주린 남자 고객으로 변신하여 온갖 추태를 연출했다. 긴 파마머리 가발을 쓴 미지는 반짝이는 메탈과 큐빅을 박은,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진한 메이크업으로 변신했다. 미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어떤 눈썰미 있는 선생이 미지를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고 그 아이의 매력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쯤 미지의 정체를 알아냈다. 학생선도 협의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미지는 행방을 감추었다. 김성한은 치를 떨었다. 설희는 미지와 함께 원우와 팥빙수 먹었던 날을 떠올렸다. 터질 듯 붉게 물든 뺨과 부끄러움이 깃든 몸짓으로 내뿜던 빛나는 미지의 조잘거림이 생각났다. 설희가 원우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들떠 있을 즈음 미지는 반대로 점점 힘이 없어 보였다. 이제야 생각났다. 미지는 어딘가 아파 보였다. 한 번은 미지가 물었다.
“요즘도 그 사람한테서 편지가 오니?”
설희가 응, 하고 입을 다물자 미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활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 속의 얼굴처럼 고요했다. 멍하게 바라보던 동공에 어둠이 일렁거렸던 것도 같다. 혹시 미지가 원우를…… 설희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했다. 설희는 원우의 근황이 궁금하다. 눈앞에 미지와 원우의 환영이 번갈아 나타났다. 미지가 룸살롱에 다녔다니, 설희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미지 집을 찾아갔다. 미지는 밤중에 온다고 미지 할머니가 일러주었다. 미지를 만나서 어쩌자는 건가. 설희는 담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가방 속에 드레스를 넣어 다녔단 말이지? 선생님도 참…… 학생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게 좋은 교육이라 할 수 없었다. 미지의 비행에 충격을 받았지만, 범죄 드라마를 보고 범행계획을 세웠다는 초범처럼 설희는 탈선의 동기를 제공받았다. 김성한 선생은 설희에게 일탈을 허락한 셈이 되어버렸다. 

  설희는 새벽이 되길 기다렸다. 곤하게 자는 진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잠이 많은 진희는 꼼짝하지 않았다. 설희는 살금살금 걸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옷이 몇 벌 되지 않았다. 파스텔 톤의 그린 색 투피스를 꺼내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 책가방 속에 감추었다. 잘 신지 않는 진희의 하이힐도 가방 속에 넣었다. 책장 제일 높은 곳에 꽂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한 권을 꺼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애지중지 아껴온 지폐 한 장이 책갈피로 끼어 있었다. 설희는 다정스러운 손길로 돈을 만지작거리고는 손지갑에 챙겨 넣었다. 날이 밝길 기다렸다. 담임에게 할 말을 준비했고 찾아가는 길도 알아두었다. 모든 준비가 되자 이불을 덮고 진희 옆에 누웠다. 원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겠다는 게야? 모르겠어, 일단 그를 만나야겠어. 설희는 교무실로 갔다. 왜? 할말 있어? 김성한은 힐끗 쳐다보고는 경영록에 뭔가를 써넣었다.

“선생님, 저 오늘 조퇴 좀 시켜주세요.”

김성한이 아, 조퇴라면 뚜껑 열리는데, 하며 머리를 까딱거리자 설희는 실습할 회사에 면접 보러 간다고 둘러댔다. 원우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운수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설희는 담임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는 미지 일로 이제 조퇴를 안 시키려고 했지만, 면접 잘 보고 오라며 설희의 등을 툭 쳤다. 명랑하던 아이가 침울하게 있으니 안타깝기만 했다. 허울뿐인 취업반에 올 아이가 아니었다. 공부를 해야 할 아인데…… 교무실을 나가는 설희의 등을 김성한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설희는 미지의 비행에 충격을 받았지만, 범죄 영화를 보고 범행 계획을 세웠다는 초범처럼 탈선의 동기를 제공받았고, 김성한 선생은 설희에게 일탈을 허락한 셈이 되어버렸다. 설희는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담임에게 거짓말하고서 남자를 만나러 가려고 조퇴를 하다니,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뻔뻔하다.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고 자신을 질책해보지만 이성의 힘은 죽처럼 풀어졌다.
설희는 교문을 나섰다. 책가방 속에는 미지의 드레스 대신 진희의 얌전한 그린 색 투피스가 들어 있었다. 설희는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것처럼 힐끗거리다 뒤로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좌우를 살피다 만두집으로 들어갔다. 가끔 지예를 따라가 만두를 먹었던 집이다. 네 명의 남동생에게 먹일 만두를 많이 팔아준 지예에게 주인 여자는 살갑게 대했다. 설희는 만두 일인분 값을 내고, 나중에 와서 먹겠다고 하고 방에 들어가 투피스로 갈아입었다. 책가방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주인 여자는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가자미눈으로 설희 얼굴을 빤히 봤다. 설희는 고개를 못 들고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모두가 학교와 일터로 가고 거리가 한산했다. 노인 서너 명이 비틀거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들이 유원지에서 내리자 마지막 종점까지 버스 에 탄 승객은 설희 혼자뿐이었다. 동호교가 먼 산 밑까지 흐르는 강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버스는 사람이 없는 정류장을 지나치며 그대로 질주했다. 남자를 만나러 가려고 수업을 빼먹고, 단발머리에 어울리지도 않는 투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아가씨 흉내를 낸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가슴은 설레고 두근거렸다. 미열까지 올라 이마가 뜨거웠다. 
원우가 싱글벙글 웃는다. 설희는 반갑지도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머릿속이 텅 비고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이다. 면회실에 딸린 매점에서 양념치킨 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배에서는 꼬르륵 쪼르륵, 공복의 울림이 애달픈 소리를 낸다. 땀이 빠지직 흐르고 어지럽다. 원우가 고개를 돌려 치킨을 먹고 있는 옆 좌석을 훔쳐보았다. 원우의 눈길에 머문 동경에 찬 표정, 그것은 어이없게도 욕정처럼 일어나는 슬픈 식욕이었다. 설희는 곁눈으로 휴게실 벽에 붙은 치킨 한 마리의 가격을 읽었다. 어쩌나…… 지갑을 털면 치킨 한 마리는 살 수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원우의 눈빛에 설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을 졸이며 치킨을 주문했다. 치킨을 원우 앞에 내려놓았을 때 텅 빈 지갑이 헤벌쭉 입을 벌렸다. 귀로의 교통비가 원우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기름기 묻은 원우의 입술이 번들거린다. 설희는 그 입술을 보며 돌아가야 할 아득한 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성 때문에 망가져 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보였다.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부대 정문에서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도 꽤나 먼 길이었다. 설희는 허기를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치킨 한 점이라도 먹어둘걸. 힘이 없어 걷다가 앉고 다시 걷다가 주저앉았다. 육체의 허기보다 마음의 허기가 곱으로 비참했다. 오후의 긴 그림자가 설희를 따라오며 물었다.
“설희야. 어떻게 갈래? 어떻게 또 걸어갈래?”
집은 까마득히 먼 곳에 있다. 이룰 수 없는 소망처럼 아득하다. 사랑과 꿈은 서로 떨어져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설희는 국토대장정에 오른 젊은이들이 축 처져서 뙤약볕을 받으며 힘없이 걸어가던 모습을 생각했다. 대장정의 이름으로 걸었던 그들의 걸음도 힘이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일사병으로 죽었다. 그들은 패잔병처럼 걸었고 설희는 난민처럼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철 이른 투피스는 겨드랑이 부근에 소금 얼룩을 만들고 축축하게 젖었다. 목이 말랐다. 사막 같은 길이다. 설희는 동호 교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교각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난간 밑으로 내려뜨려 덜렁덜렁 흔들며 막 타오르는 저녁 햇무리를 바라보았다. 에베레스트에 깃발을 꽂은 탐험가 같은 마음으로, 이성을 향해 처음으로 깃발을 꽂았던 설희에게 남은 것은 자괴감과 수치심이었다. 설희는 오랫동안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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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위험해요!”
설희는 돌아보았다. 원우에게 듣지 못한 아가씨라는 호칭을 낯모르는 행인에게 듣고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전투복을 입은 건장한 중년 남자가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그는 설희를 자살자로 오인하고 이리 나와요 어서! 하며 소리쳤다. 연희 교를 지나 동광 역까지 중년 남자와 함께 걸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말했다. 설희는 차비를 빌리고 싶은 유혹 때문에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입이 떨어지지 않아 차비를 빌리지 못하고 동광 역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등을 멀뚱히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척비척.
‘과일 수레를 끄는 엄마는 종일 몇 km를 걸을까?
6km 정도의 거리가 아직 남았을 때 설희는 푹 꼬꾸라졌다. 한적한 도시 외곽의 인도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다. 하이힐을 벗고 다리를 주무르던 설희는 울기 시작했다.
“흑흑, 엄마…….”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 등신 같은 것아, 네가 무엇이 부족해 그 꼴이냐. 자존심도 없니? 네가 지금 그럴 때니?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나. 나물 날 곳 입시부터 안다는데 싹수가 노랗다, 이 계집애야. 너까지 그럴 줄 몰랐다. 네 아비 닮아 생각 머리가 그 모양이구나. 엄마는 이리 개고생하는데 남편은 노름질에, 딸자식은 사내나 밝히고, 애 저녁에 글렀다.
한 여옥 여사가 남편 때문에 자식 앞에서 푸념할지언정 이런 상황에 내몰린 딸을 무지막지하게 몰아세우는 사람은 아니다. 오직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리어카를 끌며 장사하느라 딸과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설희는 한참 동안 자신을 쥐어뜯은 후 다시 걸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금방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는 손에 하이힐을 들고 맨발로 걷을 수 있었다. 설희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밤이 좋았다. 일탈의 대가는 그렇게 슬프고 고단했다. <6회에 계속>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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