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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부풀어 오르는 바다(9)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4월 20일

ⓒ GBN 경북방송

눈을 뜨는 순간 악몽은 사라지고 햇살은 더없이 밝았다. 어젯밤 일이 왈칵 달려들었다. 괜찮을 거야, 끝까지 간 건 아니니까. 그런데 왜 아랫도리가 쓰라릴 듯 아플까. 뾰족한 손톱이 스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맴돌았다. 그것으로 끝! 까짓것, 그런 기억은 지우개로 지워버려야 해. 설희는 속말을 하다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주일, 안식일이었다. 예수가 안식일에도 일했듯 엄마도 일하러 나가고, 언니 진희도 벌써 집을 나가고 없었다. 집안이 너무 고요하다고 생각할 즈음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설희야아.”

설희는 한 짝 열린 후스마 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니의 꺼져 드는 목소리나 밭은기침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대답 대신 아, 하며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칼 서너 올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외삼촌이 덜렁 안겨주고 간 외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종종 눈물을 찍었다. 설희는 무책임한 외삼촌을 원망했고, 할머니를 잘 모시지 못하여 오히려 역정을 내며 징징거리는 엄마를 원망했고, 할머니의 온전치 못한 늙은 육체를 원망했다. 그 모든 것이 다 가난 때문이라는 생각에 세상을 원망하다가 불공평한 하나님을 원망했다.

‘왜 우리 집은 가난할까?’

아버지 김명식이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긴 했지만, 그는 마음이 따뜻했고 약자를 도왔고, 병들고 가난한 자에게 조금 남은 돈까지 뒷생각 없이 털어주는 위인이었다. 대쪽 같은 성격의 아내 한여옥은 정직했고 성실했고 열정적으로 살았다. 죽기 살기로 사는 것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아등바등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은 삶이 아니라, 이 깨물며 버티는 엎드려 뻗치기이거나, 떨어질 듯 말 듯 발발 떨며 철봉에 매달린 극기 훈련이었다. 훈련은 끝이 있지만, 엄마의 고달픈 삶은 영원하다고 설희는 생각했다. 하나님은 불공평해. 가난한 사람들은 늘 가난하니까. 가난은 가출했다가도 바람처럼 돌고 돌다가 다시 가난한 집에 되돌아오니까. 설희는 흥, 하며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는 후쓰마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왜요, 할머니.”

시비조의 말투다.

“죽 좀 끓여다오.”

“아, 할머니, 나 늦었단 말이야.”

“냄비에, 밥 넣고, 물 한 대접만 부으면 돼야.”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 전에 벌써 부엌에 들어간 설희는 연탄불에 냄비를 올렸다. 물을 붓고 밥 덩이를 한 주걱 넣고는 바깥 수돗가로 뛰어나갔다. 좍 편 손가락 열 개가 푸드덕 푸드덕, 갑판에 널브러진 고등어가 몸부림치는 소리를 내며 빠르고 날렵하게, 세숫대야와 얼굴로 빈번하게 들락거리며 물을 끼얹었다.

“아얏!”

새끼손가락이 콧구멍을 찔러 코피가 쏟아졌다.

“계집애, 이 성질머리!”

어디서 나타났는지 진희가 놀려대며 수건을 건넸다.

“언니야! 죽, 넘칠라. 부엌에 빨리빨리!”

열 시까지 K 대학 운동장 스탠드에 집결해야 하는데 시간은 벌써 아홉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설희는 운동화를 신다 말고 소리를 지르며 나둥그러졌다. 높은 마루 밑에 놓인 댓돌에서 발을 헛디뎌 오른쪽 발목이 삐끗한 것이다. 오른발은 수난의 발이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뒷집 꺽다리 중학생의 등을 뛰어넘다 발목을 삐었던 그 발은 툭하면 탈이 났다. 설희는 절뚝거리며 동네의 긴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삼미 슈퍼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맞은편 담벼락에 붙어 발끝을 세우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지나갔다.

“설희야!”

설희는 멈칫, 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스르르 고개를 돌려 슈퍼 주인 여자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한테 밀린 외상값 좀 달라 해라!”

“네.”

설희는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에그, 너도 돈 좀 벌어라! 우리 집 애들 봐. 벌써 공장에 나가서 돈 벌어 오는데 너희 형편에 무슨 공부냐.”

다가온 여자가 설희의 가슴을 쿡 찌르며 말했다.

“네, 아주머니, 이제 곧 졸업이니까 돈 벌러 가려고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빨리 갚아드릴게요.”

설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래, 그래야지.”

슈퍼 여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설희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설희 아버지가 노름으로 엄청난 돈을 저지르고 떠난 후 집은 빚더미에 앉았다. 슈퍼 여자는 따가운 말과는 딴판으로 여린 면이 있었다. 더는 연탄이며 쌀이며 찬거리를 대 줄 수 없다며 쓴소리를 하면서도 곧잘 외상을 주었다. 그래도 궂은소리를 들을 때마다 설희는 돌아서서 주먹을 움켜쥐곤 했다.

“빨리 돈 벌어서 내가 갚아줄 거야!”

씩씩거리며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멀리서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설희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집중의 힘은 대단하다. 다리를 절뚝여도 기를 쓰고 뛰니 통증이 그만 놀라서 달아난 듯 견딜 만했다. 버스는 잠깐 속력을 늦추고 기다려 주는 것 같더니 붕, 엔진 소리를 토하며 꽁무니를 뺐다. 설희 앞에 방귀를 뽕, 뀌고는 냅다 달아나며 놀리는 뒷집 머슴애 같았다. 설희는 버스가 뿜어내는 시커먼 배기가스를 멀뚱히 바라보며 가쁜 숨을 골랐다. 그때 경적이 울렸다. 택시였다. 남자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타라고 손짓했다. 그날 밤의 폭행을 깜빡 잊을 정도로 다급했던 걸까. 설희의 얼굴에 반가움이 역력했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한 것, 방자한 끼가 마주친 운명을 덥석 무는 찰나였다. 설희는 택시 문을 열었다. K대학까지 금방 날아갔다.

입상권에 들지 못해도 설희는 기분이 좋았다. 대학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보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생소하지만 새로운 세계, 자신으로서는 언감생심이지만 생각만으로도 경이로운 세계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설희는 캠퍼스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만추의 하늘에 새털구름이 피어올랐다. 하늘을 바라보던 설희는 팔을 뻗어 손으로 구름을 쓸어 모은다. 구름은 손 안에 들어오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대학 진학의 꿈도 새털구름처럼 손에 담을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 이상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맥없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대학은 무슨, 돈을 벌어야지.”

돈이라는 말과 함께 소망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음이 다시 평온해졌다. 음악대학 건물에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이 흘러나왔다. 담쟁이덩굴 잎이 유서 깊은 붉은 벽돌을 기어오르며 바르르 떨고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에 모래가 뿌옇게 날렸다. 잔디는 푸른빛이 다 스러져버리고 누런 병색을 품고 있었다. 갈색 나뭇잎들이 발밑에 뒹굴었다. 음대생인 듯한 청년이 현관을 나와 설희 앞으로 지나갔다. 설희는 첼로를 멘 청년의 어깨를 보며 그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는 부유할 테다. 설희는 가난했지만, 대학에 갈 수 없는 가정형편을 불평하지 않았다. 가끔 하나님에게 불공평하다고 원망을 쏟곤 했지만 답답하여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부자에 대해서도 손톱만큼의 적의도 품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과 형편을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그래서일까. 첼로를 들고 가는 청년을 보고 마음이 경건해진 설희는 두 손을 모았다. 모자를 쓰고 있었다면 베토벤을 만난 괴테처럼 모자를 벗어들고 머리를 숙이고 싶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타인의 미래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쇼팽의 환상곡 덕분이었다.

—소슬하다. 아, 가을밤 비이-여 그 뉘라서— 옷 흠뻑 적시는 고—

설희의 노랫소리가 목련 나뭇가지 사이로 퍼져나갔다. 누런 잔디밭과 붉은 벽돌 위의 마른 담쟁이덩굴, 그리고 첼로, 환상곡, 이 모든 것들이 센티멘털에 젖게 했다.

“브라보!”

귀에 익은 남자 목소리!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민 치한이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설희는 놀라지 않았다. 분위기가 그랬다. 인간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무슨 이야기든지 나누고 싶은, 절실한 순간이 때로는 있는 법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좋고 쇼팽도 좋았다. 그 치한의 접근이 설희는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왜요?”

“드라이브시켜 주려고.”

“왜요?”

“왜요 왜요 밖에 말할 게 없니?”

설희는 남자에게 경계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영업해야지요.”

“해야지.”

“그런데요?”

설희는 이마를 치뜨고 남자를 똑바로 봤다.

“바다에 갈까?”

아! 바다! 눈에서 물방울이 톡 튕겼다. 영화에서나 사진으로 본 바다. 설희는 그때까지 바다 구경을 하지 못한 촌뜨기였다. 여행이라고는 다섯 살 때 고모 댁에 가면서 타 보았던 새벽의 캄캄한 화물열차만 기억했다. 바다 구경이라니! 그것도 택시를 타고서. 각자가 누리는 환경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설희는 치한에게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비로소 얼굴의 경직된 근육이 풀어졌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이. 선. 재.”

“이름이 좀 더 나아 보이네요.”

“인상이 나쁘다는 말이군. 나, 총각이야. 서른두 살. 아저씨라 하지 마.”

남자가 말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도 설희는 그 남자에게 선재 오빠니 선재 씨라고 부를 수 없었다. 저어, 있잖아요. 하다가 결국 아저씨라고 부르고 만다.

“네 이름은?”

“백. 설. 희.”

“설희? 김동리의 황토기에도 설희가 나오지?”

“맞아요. 아저씨, 문학 좋아해요?”

“왕년에 시 쓴답시고 담배 꼬나무는 것부터 배웠지. 참, 황토기에 설희가 분이에게 살해당하지?”

“다 남자 때문이죠.”

설희의 독해력은 작품의 깊은 주제를 건져내지 못했다. 두 남자의 피 끓는 격투와 용솟음치는 장사의 운명 같은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성도덕을 수챗구멍에 내던져버린 분이와 두 남자 억쇠와 득보. 읽는 내내 난교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인간의 탈을 쓴 야수들의 축제였다. 저명한 김동리 작품이었지만, 마음을 맑게 해주는 감동적 픽션을 좋아하는 설희에게는 의혹과 비릿함이 남은 소설이었다. 요조숙녀인 설희가 도화선이 되어 그들의 축제는 절정에 이른다. 조신한 설희의 인생은 가볍게 처리되고 분이와 두 남자 간의 난잡한 성을 무심하게 툭 던져놓고 작가는 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설희는 분이에 들어있는 자신을 찾아보기도 하고, 이름이 같은 설희에게 자신을 이입시켜 보기도 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귀를 물어뜯으니 살점이 떨어져 나와 뱉었다는 대목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장면을 읽다 입속에 고인 침을 뱉기도 했다. 몸이 근질근질한 야수들의 비이성적 격투 장면이 떠오르고 피투성이가 된 투견이 연상되어 책을 읽는 내내 피 냄새가 났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야릇한 불쾌감, 난잡한 인간들의 비릿한 정서에 울컥, 구토를 느꼈다. 그 이야기 속의 이름 설희. 어쨌든 자신의 이름이 살해당하는 설희라는 점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 소설 이야기가 나오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야기하는 동안 차는 어느덧 해안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 GBN 경북방송

“바다다!”

설희는 모래밭을 달렸다.
처음 본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자니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당해 기가 죽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자신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작은 조각배 같았다. 수평선 끝에 원우의 얼굴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설희는 조그만 배를 타고 그와 생을 표류하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늦가을의 바닷가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멀리 호텔을 향해 한 쌍의 연인이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큰 파도의 너울이 바위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비말을 뿜어냈다. 미지와 무상의 세계로 사그라져 가는 물거품이었다. 순간, 심연 속에서 기어 나온 나약한 설희의 영혼이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어 사랑과 증오와 절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라져갈 기쁨과 아픔의 정체들이 설희의 눈앞에 너울거렸다. 설희는 불확실한 세계의 한 끝에 서서 누구에겐가 종말을 고한다. 고통의 실체는 원우의 프렌치 키스였다. 장미의 향기와 몸서리치는 비린내가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10회에 계속>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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