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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너를 위해서(1)

서유진 소설가의 장편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2018년 2월 부터 주 2회 연재
김광희 기자 / 입력 : 2018년 01월 31일
나는 상담 선생님이 아무리 맘을 간질이고 바늘로 쑤셔도 꿈쩍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관심이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 집요함은 선생님이 입은 가죽 코트만큼 질기다. 선생님은 그 옷을 이십 년 입었다고 자랑했다. 나는 삼십 년 동안 입을 다물고 버틸 수 있다. 상담실 문을 밀고 들어가며 생각했다. 오늘도 선생님의 허연 귀밑머리를 보며 주름이 빼곡한 얼굴을 크로키 해야겠다.
ⓒ GBN 경북방송

“눈이 왔어.”

“네. 선생님.”
나는 상대가 내 비밀을 겨냥 하지 않는 한 우호적으로 반응한다.

“눈 좋아하지?”

“싫어해요.”

“왜? 너희 때는 다들 눈 좋아하잖니?”

선생님은 잠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눈을 증오한단다.”

“그런데 선생님 이름은 왜 백설희죠?”

“백설처럼 순결한 여자가 되라는 어머니의 바람이었지.”

뜨거운 전류가 가슴으로 전해온다. 다들 눈을 좋아하는데 선생님과 나만 증오한다니. 선생님과 나의 공통분모다. 그것 때문에 언젠가 비밀을 고백하게 될까 봐 신경이 곤두선다. ‘순결한 여자’라는 말이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누가 그런 말에 신경이나 쓸까. 순결을 운운한다는 사고 자체가 고리타분하고 촌스럽다.
어떤 친구들은 남자 친구와 사귀는 사진을 SNS로 공유하며 행복해 한다. 키스하듯 입을 댄 얼굴이 인터넷에 나도는 판이다. 이웃 소도시에서 전학 온 다정이는 미혼모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 애는 늘 밝게 웃는다. 도무지 고민이 없다.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 사랑해서 얻은 임신이라면 순결의 꽃망울이 터진 것인가. 나는 미혼모 친구와는 다르게 이런 글을 SNS에 올렸다.

―한 여자가 어떻게 순결을 잃고 영혼에 피를 흘리고 찢기는지, 맑고 순수했던 그녀의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파괴되어 가는지, 어떻게 삶이 망가져 가는지 남자들은 모를 거예요.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듯 사랑에 빠진 연인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첫 경험이 여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랑의 원천인지 아시는가요. 사랑의 원천이 여자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한 적 있나요. 첫 경험, 첫사랑, 순결이라는 단어는 지금 이 시대에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같아요.

대번 댓글이 올라왔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지금이 조선 시대요?

―왜 하필 남성을 지목합니까? 지금은 성 개방시대입니다. 요즘은 여성이 더 적극적이라고요.

―님은 너무 심각하시네요.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사랑하고 가볍게 섹스하고 가볍게 이별하는 이 시대에 구태의연한 발상 아닌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혼 없는 로봇이 아니지요. 가볍게 부딪쳐도 상처가 나고 생채기가 되어 딱지가 앉는다고요. 새 살이 돋아나기까지 가렵고 쓰리고 아픈 인간이라고요.

―여자만 처녀성을 잃고 아픈 줄 알아요? 우리 남성도 같은 인간입니다!

―이 힘든 시대에 그 문제가 왜 튀어나와야 해요? 할 일 없소? 취직도 못 해서 죽을 지경인데.

―힘들수록 사랑이 그리워지는 거 아니에요?

댓글과는 달리 당신의 여자 친구가 처녀성을 지키고 있기를 원하느냐는 설문에는 99%가 예, 라고 대답했다. 아이러니다.
지금은 같은 학교 동급생과 아이를 낳아도 배려해주는 세상이다. 사랑하면 부끄럽지 않단다. 나도 그런 사랑을 동경했는데 모든 것이 어긋났다. 나를 범한 남자가 흉악범으로 수배되었다. 그가 오늘의 비천한 나로 전락시켰다. 그날 밤처럼 아파트 옥상에서 다시 만난다면, 논개처럼 안고 함께 뛰어내릴 것이다. 기필코 찾아내어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침묵만이 유일한 길이다.

“오늘은…….”

선생님이 허공을 바라보더니 눈언저리를 닦았다. 눈에 티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좀 민망스러운 풍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을 많이 해 봤단다. 이제 널 괴롭히지 않을 게. 네가 하고 싶을 때 이야기해.”

나는 선생님의 상담 낚시에 걸려든 피라미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지난가을이었다. 보건실에서 온종일 잤다. 마침 오후에 보건 선생님이 출장을 가고 나 혼자 보건실을 차지했다. 하교 시간까지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119에 실려 갔다. 내 교복 주머니에 든 알약 때문에 나는 자살미수로 낙인찍혀 버렸다. 나는 완전한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 가까이 갈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 나의 심연은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느껴보고 싶었다.
백설희 선생님은 1학년 때 만났다. 창의 재량 시간에 필기한 내 노트를 보고는 늘 칭찬을 퍼부었다. 시 암송, 진로 탐색, 소설 감상 등 어떤 분야에서든지 선생님은 나를 불러 세워 발표를 시켰다. 내게서, 가르치는 성취감을 느낀 듯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감탄사는 빨간 풍선 터지는 소리처럼 경쾌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입을 다무는 고집쟁이가 아니었다. 주어진 생활과 학업에 순종하는 행복한 철부지 1학년이었다.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느낀 선생님이었는데 1년 병가를 냈다가 3학년 때 학교로 돌아오셨다.
그때가 좋았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저쪽 시간이다. 이제 선생님의 질문이 지긋지긋하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던 네가 왜 이러니? 다 털어놓고 나면 시원해질 거야. 대학은 어떻게 할래? 하기야 지금 너로서 대학이 문제가 아니겠지. 엄마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지? 넌 창밖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니? 수업시간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니? 눈물이 네 턱밑으로 줄줄 흘러내린다고 선생님들이 알려줬어. 눈이 아파서요. 눈을 뜰 수가 없어서 감고 있는데 그냥 흘러내려요. 그건 생리적인 현상이에요. 병원에는 갔니? 아뇨. 어제는 병원에 갔다 왔니? 안 갔어요. 못 갔어요. 왜 가보지 않고. 계속 안 갔다고 하는 내가 반항아 같아서 어느 날은 병원에 가지도 않고 의사가 이상 없다 한다고 거짓말했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내 뱃속이 더부룩한 것, 그것은 어떤 징조일까. 임신?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다. 진짜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파렴치한 놈의 씨를 배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만 할 때 말이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모기만 해졌다.

“너만큼 우울하게 보냈단다.”

“저는 우울하지 않아요. 화가 나서 폭탄을 터뜨리고 싶은 걸 참을 뿐이에요.”

“나도 그랬어. 나는 자폭하고 싶었단다.”

선생님이 다가앉으며 다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오늘은 내 이야기 좀 들어보겠니?

“왜 선생님 이야기를 제게 하시려고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면 네가 위로받을까 싶어서.”

선생님이 입술을 깨물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선생님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며 소녀적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심리학 박사에, 상담 전문교사가 됐으니 아마도 공부만 열심히 한 범생이었겠지. 나는 시비 걸듯 대꾸했다.

“화초밭의 꽃으로 자라셨을 선생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요.”

“그렇지 않아. 이 세상에 고통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때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간단다.”

선생님은 굳게 걸어 잠근 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려는 것 같다. 교묘하게 심리적 거미줄을 쳐놓고 내 마음이 걸려들길 기다릴 것이다. 찔끔찔끔 비밀을 쏟아낼까 두려웠지만, 진심으로 다가오는 선생님을 뿌리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자식의 비명을 독하게 견디며 곪은 상처의 피고름을 짜내는 어머니 마음이었다. 실망을 드릴 수는 없었다.

“오늘같이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날이 떠올라. 그때 내 나이가 열아홉이었어.”
선생님의 시간이 거슬러 오른다.





작가 소개

↑↑ 서유진 소설가
ⓒ GBN 경북방송

서유진

소설가   
대구 출생, 경주 거주 
고등학교 교사(전)
한국소설가협회, 대구소설가협회, 경주문인협회 회원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총각선생, 짱생의 하루」
소설집《하프턴》세종나눔도서 선정
웹 장편 『스무 살이 사랑한 다섯 남자』
중편 환타지「억새꽃이 피었어요」
「배반네거리」「완벽한 풍경」「과속방지턱」등






김광희 기자 / 입력 : 2018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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