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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여름 산책(2)

서유진 장편소설이 2018년 2월부터 주 2회 연재함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1월 31일
셔츠 단추를 풀어 젖힌 중년 남자가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걸어갔다. 손에는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막다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질러가서 툇마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제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별안간 몸이 불에 덴 듯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내 돈! 내 돈!”

그가 뛰어오른 높이는 족히 일 미터는 되었다. 설희는 부엌문 뒤에 숨어서 아버지의 숨찬 호흡 소리를 듣고 있었다. 늘 하는 순서대로 다음에는 들고 온 소주병을 들이키리라. 역시 소주병을 나팔 불 듯 빨았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운 병을 흔들어 보더니 허공에 높이 치켜들고는 소리쳤다.

“이놈의 손가락을 잘라 버려야지!”

병을 툇마루 기둥에 내리쳤다. 유리 조각이 흩어지고 움켜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설희는 아버지가 손가락을 자를 만큼 의지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망설였다. 나갈까, 말까. 그럴 수 있는 위인이라면 벌써 도박을 끊었지. 아마도 너덧 병은 해치웠을 테다. 술이 깨면 오만상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을 문지르며 속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댈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손에서 피가 흐르는데……
마침내 설희가 아버지를 부르며 뛰어나갔다.

“나는 죽어야 해!”

설희는 뻗대는 아버지를 겨우 방에 눕혔다. 울다 웃다 세상을 욕하는 아버지를 달래며 상처 난 손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뜨거운 숭늉을 끓여서 먹이자 아버지는 곧 쓰러져 잠들었다. 설희는 밖으로 나가 깨진 유리 조각을 쓸었다. 가끔 아버지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빗자루를 든 채 방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지긋지긋한 풍경이었다. 저녁에는 또 엄마의 악다구니로 지붕이 들썩일 테고 밤이 이슥하도록 울음을 들어야 할 테다. 끔찍한 지옥이었다. 이럴 때는 지옥을 벗어나는 게 순리라며 옷을 갈아입었다. 일요일이지만 외출복이 없어 교복을 입었다.
집을 나왔을 때 해가 정수리를 지나고 있었다. 끓는 쇳물을 들이붓는 듯한 열기에 뇌가 흐물흐물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몇십 년 만에 찾아온 한발로 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 나무가 피부병을 앓듯 부옇다.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녹아내린다. 설희는 그늘로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불볕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차량의 소음에 뒤섞여 들려오는 듯했다. 머리는 뜨거웠지만 마음은 춥기만 하고, 외롭고, 막막했다.

‘작열하는 저 태양을 쏘고 싶어.’

그때에야 까뮈의 이방인을 이해할 듯했다. 태양이 눈부셔 총을 쏜 뫼르소처럼 태양이 뜨거워서, 너무 뜨거워서 총을 갈기는 이방인. 이런 식으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오소소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 때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같은 반 미지였다. 설희는 평소 친하지도 않은 미지와 금방 의기투합하여 걷기 시작했다. 왜 하릴없이 뙤약볕 아래를 걷는단 말인가. 미지가 손부채질을 하며 여행가고 싶다고 했다. 설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꿈도 꿔서는 안 될 말이었다. 소녀가장인 미지 역시 지병을 앓는 할머니를 돌봐야 했다.
ⓒ GBN 경북방송

“답답해.”

미지가 조그만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새로 지은 역사의 웅장한 지붕이 지척에 보였다. 그들은 나침반에 이끌리듯 역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설희와 미지도 떠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8킬로미터 넘게 걸었으니 몸이 피곤했다. 미지는 대합실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설희는 눈을 감았지만 미지처럼 쉽게 잠들지 못했다. 설희는 환청을 듣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성적을 발표하는 담임선생의 목소리다. 백설희! 일등. 이름표가 허공에 너울거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성적이 좋아 베스트 텐으로 게시판에 이름이 나붙었던 설희였다. 공부를 잘하면 무엇 하나, 베스트 텐의 자부심은 사라진 신기루에 불과했다. 명예는 유효기간이 지나버렸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은 대학을 포기한 기분이 어떤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설희는 퇴락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본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베스트 텐. 지금은 캄캄한 동굴 안에 웅크려서 단물이 다 빠져나간 추잉검을 씹듯 질겅질겅, 지나간 날을 씹고 있을 뿐이다.

“아, 더워.”

미지가 잠이 깨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설희는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연신 외어대는 방송과 소음에 까무룩 정신을 잃을 것 같다. 그런데 맞은편의 군인 둘이 설희를 보고 웃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다가왔다. 그중 키 큰 남자가 설희 옆의 빈자리를 눈짓하며 말을 붙였다.

“앉아도 돼?”

“네.”

“교복 참 예쁘네. 하얀색이 눈부셔.”

“우리 학교 교복이 제일 예쁘죠?”

얌전한 미지가 거들자 설희도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안 더우세요? 아저씨.”

옆의 군인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대답했다.

“습관 되면 안 더워. 햇빛을 가려주니까.”

“습관이 사람의 미래를 만든다잖아.”

키 큰 남자가 말을 보태고는 우리 아저씨 아닌데, 총각인데,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설희는 그 과장된 웃음이 순박해 보였다. 그는 얼굴이 잘생겼다. 예리해 보이지는 않지만 지적인 인상이다. ‘삼국지’의 유비 현덕 풍이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애슐리 풍이다. 그가 설희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초등학교 때 위문편지 썼어요?”

“아뇨.”

“우린 썼는데.”

“우아, 세대 차이!”

미지가 몸을 흔들었다. 미지의 교태가 어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설희는 자꾸 웃었다. 말똥이 굴러가도 웃는 나이였다. 설희는 지금 이 순간, 정말 말똥이 굴러가는 것을 보면 배꼽을 잡고 웃을 것 같았다. 둘 다 한껏 입을 벌리고 까르르, 호호. 다른 남자라고는 마주한 적 없는 설희와 미지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초딩이 시절 위문편지 안 써줬으니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나라를 지키는 우리에게 위문편지 써 줘야 합니다.”

설희는 키 큰 남자가 주는 주소를 받아들었다.

“팥빙수를 사 줄게. 다음 토요일에 뉴욕 제과로 나와. 313번 버스를 타고 국세청 앞에서 내려 중앙지하도 입구까지 가서 현대 백화점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삼백 미터 가면 뉴욕제과야.”

김원우.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여동생에게 모르는 수학 문제를 풀어주듯 찬찬히 길을 가르쳐 주었다.

설희와 미지 앞에 고봉으로 올린 팥빙수가 녹고 있다. 빙수는 먹지 않고 이야기만 오간다. 설희는 흘러내리는 콩고물을 자꾸 위로 떠올렸다. 원우가 하는 말이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이 벅적대고 와글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릴 뿐이었다. 설희는 자신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비적 거리며 흘러나오는 것을 상상하며 손으로 입술을 닦았다. 원우와 미지가 주고받는 말에 솔깃해져서 혼이 빠져 듣는다. 평소에 능변인 설희는 수줍게 웃고만 있었고, 새침 뜨기인 미지는 온몸으로 조잘거렸다. 미지의 유머가 통통 튀는 탁구공 같다. 후광에 둘러싸인 미지의 말은 빛나는 은유. 터질 듯 붉게 물든 뺨으로 몸을 배배 꼬는 미지…… 원우에 대한 호감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미지보다 설희가 더 적극적이었다. 원우는 설희보다 일곱 살이나 더 나이 먹은 청년이었지만 설희의 눈에는 순박한 고등학생 남자애로 보였다. 남자와는 초등학교 때 짝꿍 외는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열아홉의 설희에게 이성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설희는 편지지를 앞에 놓고 무엇을 쓸지 궁리했다.

‘미지에게는 비밀이야. 뭐라고 부를까.’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워도 오빠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원우 씨’는 더더욱 어색했다. 그래서 바로 본문으로 들어갔다. 연민의 감정이 원우를 자극하길 기대하며 문장을 쥐어짰다.

―가난했기 때문에 절망이 일찍 찾아왔습니다. 가난은 외로움이고 가망 없는 희망입니다. 덕지덕지 얼룩진 남루한 삶을 검은 허무의 막으로 가리고 삶을 견딥니다. 슬프고 암담한 날이 아득한 사막처럼 끝없이 펼쳐집니다. 나는 걷습니다. 비틀거리며 신기루를 보고 걸어갑니다. 신기루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초록빛이 어른거리는 그곳을 향해 지친 걸음을 쉬지 않습니다.

편지를 보내자 원우가 즉시 답장을 보내왔다.

―검은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검게 보여.

설희는 입을 삐죽였다. 얼마나 상투적이고 진부한가. 자신을 어른이라 생각하는 치기 어린 설희가 원우를 힐문했다.

―이미 세계는 시커먼 암흑 아닌가요. 빨간 안경으로 보면 세상이 빨갛게 보인답니까?

설희는 첫 이성에게 무거운 스텝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원우에게 설희는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 다시 편지가 왔을 때 설희는 더 실망하고 말았다.

―네가 최소한 K대학에 합격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나 만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해.

‘뭐? K대학에 합격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겠다고?’

속내를 다 보인 꼴이었다. 설희는 원우가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마음 내키는 대로 흔드는 것 같았다.

‘대입이라니! 최소한 K대학이라니! K대학이 얼마나 들어가기 힘든데!’
<3회에 계속>





작가소개

↑↑ 소설가 서유진
ⓒ GBN 경북방송

서유진

소설가   
대구 출생, 경주 거주 
고등학교 교사(전)
한국소설가협회, 대구소설가협회, 경주문인협회 회원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총각선생, 짱생의 하루」
소설집《하프턴》세종나눔도서 선정
웹 장편 『스무 살이 사랑한 다섯 남자』
중편 환타지「억새꽃이 피었어요」
「배반네거리」「완벽한 풍경」「과속방지턱」등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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