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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아가씨, 아가씨(3)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2월 09일
ⓒ GBN 경북방송

설희는 공부는커녕 원우에게 뻔질나게 전화했다. 늘 그의 가족이 받아 시내에 갔다고 알려주었다.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우는 연락이 없었다. 물론 설희에게 편지 외에는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편지도 오지 않았다. 설희가 연락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설희 네는 전화가 없었으니 오직 설희의 의지만이 연락의 통로였다.

원우가 부대에서 외출 나오는 토요일 저녁, 설희는 산책을 나섰다. 원우의 집 주소를 들고 길을 물었다. 버스비가 없었기 때문에 설희는 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걸어야 했다. 줄곧 원우 생각에 빠져 지겨운 줄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걸었다. 원우의 집은 한적한 도롯가에 있었다. 설희는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대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열린 마루문 안에 노인이 어른거렸다. 설희 만한 나이의 여자애도 보였다. 누가 틀었는지 집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왜 이 집 앞에 서 있는가. 설희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다 마음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을 배회하는 가난한 마음을 알 듯했다. 사랑이라니? 설희는 피식 웃었다. 자신을 비웃는 거였다.

‘연인의 집 앞을 배회하는 노래 속의 주인공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이유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수성이 풍부한 십대이기도 하지만 원래 눈물이 많은 설희였으니 노랫말이 절절이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원우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설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거대한 높이의 플라타너스가 제 위엄을 자랑하는 듯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설희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멀뚱히 보기만 했다.

“이런! 시간이 없는데. 그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겠지? 다음에 보자. 잘 가라.”

원우는 찔끔 물총을 쏘듯 말을 뱉고는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설희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두 발짝 걸어가던 그가 뒤로 돌아보았다. 설희는 긴장했다. 원우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나 지금 머리 긴 아가씨와 데이트 하러 간다!”

원우가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단발머리인 설희는 졸업하면 죽을 때까지 머리를 기를 거라고 다짐했다. 긴 머리칼을 매만지며 웃음 짓는 아가씨가 줄곧 떠올랐다. 그것은 포스터가 아내에게 바친 노래, 금발의 제니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한 송이 들국화 같은 제-니- 바람에 금-발 나부끼면서 오늘도 강- 언덕 달-려오네

원우가 만나러 간다는 아가씨가 포스터의 아내, 금발의 제니처럼, 들국화처럼, 청초하게 빛을 내면서 설희의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설희는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나뭇가지에 대롱거리는 잎에서 똑, 똑, 이슬이 떨어지는 단어이다. 아가씨라는 단어가 소녀보다 더 순결하고 어여쁘고 환상적으로 보였다. 소녀인 자신을 팽개치고 아가씨를 만나러 간 원우가 원망스러웠다. 손을 흔들고 벙글거리며 무참히 떠나가는 원우. 설희는 아가씨가 아닌 소녀라는 사실이 억울했다.

일주일이 더디게 지나갔다. 신화동 도로변에 아담하게 서 있는 원우의 집까지 설희는 또 걸었다. 버스비는 물론 없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돈을 벌러 나가지만, 돈이라고는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어느 날 시커먼 선글라스를 끼고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집에 와서 가재도구를 살폈다. 뒤져봐야 가져갈 것이 없었다. 남자들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후,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그들의 낭패한 시선에 설희 가족은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니 설희는 오 원짜리 동전 하나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동전은 때때로 가치측정이 불가능한 어마한 효과를 발휘했다. 거짓말 같은 일이다. 원우를 알고 전화를 걸게 되고부터 설희는 오 원짜리 동전을 좋아하게 되었다. 원우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설희의 집은 요금체납으로 강제로 전화가 끊긴 게 아니라 애초에 전화라는 것을 가설할 수 없는 원초적인 가난뱅이였다. 아니다. 반에서 부잣집 친구 서너 명만 집에 전화가 있다. 대개가 다 가난하니 원초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가난뱅이는 가난뱅이였다. 그래서일까. 공부 잘하는 설희에게 몰려드는 친구를 설희는 멀리 했다. 일등으로 입학한 지예만이 친구라고 여겼다. 가난한 티를 잔뜩 내고 다니는 미지는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별로 교제가 없었다. 미지는 가난이 뭔지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네 살 박이 어린애처럼 보였는데 설희는 맹하게 웃는 미지의 얼굴에서 때때로 현실을 수용하는 놀라운 성숙함을 발견했다. 학교성적만 좋았다 뿐 설희는 자신을 아웃사이드라 했다. 그리고 또 설희는 자신을 스스로 고독한 별이라 했다. 그런 나르시시즘에 빠진 프라이드가 원우라는 남자 앞에서만 유독 vanity로 변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베너티한 자부심이라니!’

그건 허영심, 허식에 가까운 자부심이었다. 자기 능력이나 용모에 대해서 실제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심정은 인간을 고무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슬프게도 남의 평판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 점에서 설희는 자신의 자부심이 비참했다. 가난 자체는 참을 수 있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원우 앞에서 구겨지는 자존심이었다. 아니, 사실은, 구겨질 자존심이 아예 없었다는 생각이 설희를 고통으로 내몰았다. 황홀하고 거대해 보이는 자존심,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그 단어 때문에 설희는 고통 받았다. 무심하게 밟아 재활용수거함에 던져 넣은 음료 캔처럼 원우 앞에서 우그러지는 자존심은 자존심이 아니었다.

동전, 어쨌든 소중한 동전이었다. 에러를 내면 동전은 철커덩, 하고 원우와 자신을 끊어놓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설희는 땅에 지뢰가 묻어있기라도 하듯 조심조심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갔다. 포복을 해서 접근해야 한다면 교복 스커트를 땅바닥에 끌면서라도 기어갈 것이었다.
천천히 수화기를 들고 귀에 갖다 댔다. 동전을 엄지와 검지로 꼭 움켜쥐고 천천히 구멍 속으로 넣었다. 다이얼에 손가락을 끼우고 잘그락 잘그락 돌릴 때 심장 소리도 잘그락거린다. 그의 굵직한 음성이 들리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불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이성이라는 존재에 잠시 한 눈을 팔고 있는 거다.’

그런 구차스런 핑계가 더욱 설희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설희는 다이얼 9를 두 번 돌리며 건질 구로 의미를 붙였다. 구라는 숫자가 마지막에 붙어 있으므로 최후에는 이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했다. 명료한 신호음이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동전이 철컥, 빨려 들어갔다.

“여보세요.”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원우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가슴은 방망이질로 아플 지경에 다다른다. 설희는 그의 목소리를 받아들기에 숨이 가빴다. 그의 목소리를 움켜쥐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수화기를 바꿔드는 순간 전화선이 수화기 걸림 쇠를 건드렸다. 찰칵.

“어, 어, 여보세요!”

찰칵, 하는 소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애절한 목소리가 수 천 미터 너머로 사라져갔다. 설희의 숨결에 달궈진 전화 부스 안의 뜨거운 공기가 자욱하게 시야를 덮었다. 설희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동전 하나를 삼킨 공중전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애끓는 숨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마지막 남은 동전 하나로 이번에는 복수라도 하듯 빠르고 거칠게 돌렸다.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금방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원우의 여동생인 듯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방금 나갔는데요.”

설희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와서 원우의 집 쪽으로 필사적으로 달렸다. 원우는 벌써 대문에서 나와서 설희보다 삼십 미터 가량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지옥과 천국의 거리였다. 설희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원우의 등 뒤에까지 달려가서야 숨을 헐떡이며 그의 등을 툭, 건드렸다. 뒤돌아본 원우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왜 전화를 하지 않고?”

“전화는 내가 할게요.”

집어삼킨 동전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원우는 설희가 고의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는 줄 알았는지 이제야 집 전화 몇 번이지? 내가 전화 할게, 했다. 집에 전화가 없단 말을, 그렇게 지독한 가난뱅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설희는 자신이 왜 그렇게 가난 때문에 기가 죽는지 몰랐다.
퉁명스런 대꾸에 원우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떡이더니 나, 지금 약속 있어. 잘 가.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 가버렸다. 변한 게 없다. 설희는 막막해져서 키 큰 그의 등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그는 또 아가씨와 데이트 하러 가는 거였다. 설희는 구겨진 자존심을 거리에 내던지고 터벅터벅 걸었다. 집 가까이 왔을 때 발에 물집이 생기고 녹초가 되었다. 설희는 그를 기억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했다. 노력은 부질없었다. 원우에게 사로잡힌 설희의 영혼은 집착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집착은 광기가 아닌가.’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정상적인 관심이 아니다. 배려는 더욱 없다. 진정한 사랑은 행위 주체자의 시선이 자신보다 상대에게 가 있다. 집착은 시선이 오로지 자신에게로만 향한다. 그러니까 집착은 에고의 뿌리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설희는 에고이스트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생각을 해도 원우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설희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일주일 내내 의식을 뒤흔드는 원우를 몰아내려했지만 그럴수록 더 깊게 빠져들었다. 설희는 자리에 누운 할머니의 밭은기침 소리에 잠깐 정신이 들었다. 쿨럭쿨럭. 쿨럭 쿨럭. 목구멍에 끓어오르는 할머니의 가래처럼 설희의 자괴감도 부글거리며 요동쳤다. 설희는 머리채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구석자리에 두리반을 폈다.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글자가 설희를 놀리며 달아난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망상 속에서 하루하루가 초조하게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원우가 자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해 줄까. 어떻게 하면 원우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아가씨를 밀어내고 자신의 존재가 들어앉게 될지 궁리했다. 조금 후 설희는 머리를 끄떡였다. 묘안이 떠오른 것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우면서 설희는 장롱 위에 올려둔 여행용 가방을 내렸다. 가방은 왜?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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