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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잔혹한 키스(4)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2월 18일

ⓒ GBN 경북방송

 설희는 여행용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 속에 얇은 체육복 한 벌과 책 한 권을 넣었다. 정말 여행을 떠나려 한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할 테지만 그저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가방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무게를 가늠했다. 여행용 가방은 큰 트렁크여서 자체의 무게만으로도 내용물이 꽉 찬 느낌이었다. 설희는 트렁크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우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가출 소녀가 되어 나타났을 때 당황할 원우를 상상하고는 웃음을 흘렸다. 사람됨이 인간적인 원우라면 가출 소녀에게 예상되는 위험을 막으려 할 것이고,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각본이 기발하기까지 했다.

“트렁크 들고 어디 가?”

부엌 샛문으로 방에 들어온 진희가 불러 세웠다. 설희는 갑자기 나타난 진희를 보고 깜짝 놀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댔다.

“어디 가는 게 아니고 우리 반 연극 연습에 필요하거든.”

“고3이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연극이야.”

“언니는 또 잊어먹었어? 우리 반은 취업 예능 혼합반이라니까. 가난한 애들은 수판 튕기고 부자 애들은 비행기 타고 서울로 레슨받으러 다닌다니까.”

명문고가 아니면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 50%도 합격하지 못하는데, 진희는 합격해도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수학 왕이었지만. 2년제 전문대학과 예체능 학과는 대입 예비고사에 불합격해도 돈만 있으면 입학할 수 있다면서 진희가 입에 거품을 물고 교육정책을 빈정거리자 설희도 거들었다.

“언니야, 우리 반 얘들 중에 성적이 끝에서 빌빌하지만 노래를 좀 잘하는 애가 있어. 걔도 이제야 음대에 들어가려고 레슨받으러 다닌대. 음대만 졸업하면 교사도 할 수 있다면서.”

“가난하면 꿈도 못 꿀 일이야.”

진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일물산이라는 회사에 다니던 진희는 회사에서 쫓겨나 쉬는 중이었다. 해고된 이유가 회사비방 선동죄였다. 진희는 한숨을 쉬며 트렁크를 열었다. 책 한 권과 체육복 한 벌이 든 트렁크마저 가난해 보였다. 진희가 고개를 끄떡이고는 말했다.

“몸은 조그마한 게 이렇게 큰 트렁크를 질질 끌고 가는 거 보면 사람들이 다 웃겠다.”

설희는 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심각한 상황에 빠진 여학생으로 연출만 할 수 있으면 되었다.
원우는 늘 저녁 외출을 나가는 바로 그 시간쯤 설희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드디어 원우가 설희 앞에 나타났다. 담배를 입에 문 원우의 침울한 얼굴을 설희는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여고생이 교복을 입고 큰 트렁크 하나를 들고 무작정 상경이라니, 원우는 비로소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서너 차례 내뿜고 말했다.

“우선 트렁크는 우리 집에 두고 올 테니 여기서 좀 기다려라.”

원우가 설희의 트렁크를 받아들고 바쁘게 집으로 뛰어갔다. 설희는 두 손을 모아 코와 입을 감쌌다.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토요일이지만 오늘따라 밤 열 시까지 부대에 복귀해야 하는 원우는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캄캄한 가도를 달리는 택시 안에는 후덥지근한 침묵이 흘렀다. 설희를 조여 매고 있던 우울과 외로움의 끈이 스르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 끈은 부드럽고 아주 길게 풀어져 강을 향해 떠내려갔다. 따뜻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고 몸이 더워졌다. 설희는 훨훨 날갯짓을 하며 푸른 강을 건너고 있었다. 설희는 자신의 무의식이 원우와 아름다운 스캔들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화들짝 놀랐다. 스캔들이라니? 설희는 반문했다.
‘스캔들의 의미는 추문이잖아. 나는 그저 그와 만나기를 꿈꾸었을 뿐이야.’
고속도로 진입로를 뒤편으로 끼고 강이 흘렀다. 원우가 강변 가까이 택시를 세웠다. 넘어질 듯 어렵게 어두운 풀밭을 헤치고 조금 걸어갔다. 그들은 풀밭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시야가 환해졌다.

설희는 그날까지 강변에 가 앉아본 적도, 바다에 나가 맨발을 적셔본 적도 없었다. 오직 시내 한복판 시장통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동네 골목길에 가린 손바닥만 한 하늘, 판자벽에 둘러싸여 바람이 불면 늘 처렁처렁 울어대던 낮은 양철지붕에 가려진 조그만 하늘을 보았을 뿐이다.
유명한 시인, 소설가들은 유년을 회상하거나 성장소설을 쓰며 설희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예쁜 꽃 이름과 나무 이름, 새 이름을 읊으며 가난했던 유년을 노래했다. 한 무리의 진달래, 안개 속에 떠 있는 눈 얹은 산, 작은 고깃배, 외로운 등대, 반짝이는 바닷물결, 항구, 가파른 언덕, 아스라지꽃, 갈대밭,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미루나무, 산유화, 보리수 그늘…… 그들이 얼마나 풍요한 자연 속에서 낭만을 누리고 살았는지 서로 자랑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작가들의 가난은 풍요했고 여유롭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격조 높아 보였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설희는 그들이 피력했던 가난과 궁핍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가난한 시골 출신 작가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들의 아름다운 고향은 설희의 가난을 상대적으로 비천하게 만들었다.
한줄기 강바람이 불어왔다. 별들이 파르르 몸을 떤다. 설희는 원우와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가난하고 황폐한 이 세상에 지금 원우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뜨겁게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별똥별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설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가 달래주면 더 서럽게 우는 어린아이처럼 원우 앞에서 섧게 울고 싶어진다. 밤하늘은 아름다웠고, 별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고결한 존재였다. 설희의 영혼은 높이 오르고 있었다. 그때 원우가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이제 말해 봐. 왜 집을 나왔지?”

설희는 행복한 꿈에서 깨어났다. 원우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 GBN 경북방송

“하늘을 봐. 저 별들처럼 너도, 네 미래도 반짝여야 해.”

원우의 말이 한 줄의 시가 되어 마음에 스며들었다. 별들이 가슴팍으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설희는 눈을 감았다.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심연으로 깊숙이 들어와 단단히 에워싼 돌벽을 뚫고 뜨겁게 넘쳐흘러 뇌리를 적시고 몸을 적셨다. 영혼이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원우가 설희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부드럽고 촉촉한 두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러운 솜사탕을 한 입 베어 문 듯 감미롭다. 설희는 눈을 감았다. 인슐린이 분비되고 아드레날린이 배출되고 있었다. 설희는 몸속의 백혈구가 프런트 킥을 시작하여 사이드 킥, 립 점프로 종횡무진 힘차게 도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뺨이 불타듯 화끈거렸다. 양팔을 벌려 자연스럽게 원우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휘감았다. 따뜻하고 넓은 가슴이었다. 원우의 손과 입술이 양털처럼 따스하게 설희의 영혼을 쓰다듬고 있었다. 열아홉 해 동안 외롭게 다물고 있던 침묵의 입술이 원우를 향해서, 다가올 사랑의 예감을 향해서 벌어졌다. 그때 설희의 머릿속에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마리아와 로버트 조던의 키스 장면이다.

“설희야, 머리를 돌려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설희는 이미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처음 해 본 키스지만 코 따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연적으로 저 갈 곳을 찾아갔다. 헤밍웨이는 그렇게 재미있게 키스 장면을 쓰고 있지만 설희는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의 생리는 본능적으로 움직여지는데, 창조주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건데…… 설희의 상념이 계속되었다.
로댕의 조각 「입맞춤」도 고개가 서로 오른쪽으로 돌려져 있고, 인간은 태중에서 벌써 시선이 오른쪽으로 치중되어 자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도 키스할 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몸과 마음이 환희에 젖어 들었다. 젖어든다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기어 나와 빙글빙글 돌며 춤추었다. 몸의 체험이 생생한 언어를 만들어냈다. 설희는 마음속으로 사랑의 시를 짓기 시작했다. 연못의 물수제비처럼 말들이 퐁퐁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희는 궁금했다. 설희의 열정은 무지하게 많은 열량을 소모시키면서 폭발했다. 무수한 빛의 세례를 받고 마음이 충만해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원우의 맑은 눈빛이 다가왔다. 설희는 그의 눈 속에 어른거리는 자신에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린 내게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 그래도 이 첫 번째 키스를 사랑의 키스라고 부를 거야.’
키스가 뿜어내는 천연진통제 엔도르핀이 사랑하는 이에게 영혼을 바친다. 그것은 환희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키스는 어떤 것일까? 설희의 머릿속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장면이 펼쳐졌다. 스칼렛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렛버틀러는 스카렛의 얼굴 위에서 애정이 깃든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설희는 키 큰 원우의 얼굴을 스칼렛이 하듯 올려봤다. 모든 것을 던지고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삶은 고통만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원우가 입술을 떼는 순간 어둠이 밀려왔다. 설희는 소스라치게 놀라 원우를 밀쳐냈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잖아.’
자신을 두고 머리 긴 아가씨와 데이트하러 간다며 싱글벙글 웃으며 떠나가던 원우였다. 자신의 존재는 그에게 어린 계집애에 불과했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 흐르는 침묵 속에 입술의 감촉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허공에 맴돌았다. 그 느낌은 설희를 까무러치도록 애무하다가는 불시에 고통의 바다에 내동댕이쳤다. 설희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의미의 키스인가? 키스의 의미는 모호했다. 망망한 사념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설희의 심연은 쇠잔해졌다. 그녀는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생각했다. 실연의 짠물을 마신 듯한 예감이었다. 자신의 몸이 팅팅 불은 사체로 변해 어두운 해변에 밀려와 끼욱거리는 갈매기의 비웃음을 듣고 있었다.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것은 잔혹한 키스였다. <5회에 계속>



소설가 서유진
↑↑ 서유진 작가
ⓒ GBN 경북방송

대구 출생
고등학교 교사(전)
한국소설가협회, 대구소설가협회, 경주문인협회 회원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총각선생, 짱생의 하루」
소설집《하프턴》세종나눔도서 선정
웹 장편 『스무 살이 사랑한 다섯 남자』
중편 환타지「억새꽃이 피었어요」
「배반네거리」「완벽한 풍경」「과속방지턱」등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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