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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심남일 선생

호남벌을 호령한 불세출의 의병장
김성배 기자 / 입력 : 2010년 11월 05일
↑↑ 심남일 선생
ⓒ GBN 경북방송


전라도 함평의 작은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심수택(沈守澤)은 1907년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맹세와 함께 의병의 길로 나섰다.

심남일(沈南一)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장 기삼연의 의병부대로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결국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는 등 의병 부대가 와해 지경에 처하자 그는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서당 훈장에서 의병장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전국의 동포들은 다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앉아서 고래 떼처럼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중략)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된다고 하지 말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 일을 치루어 나간다면 천하 만국이 또한 반드시 우리를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심남일 「격고문」)

그는 이와 같은 격고문을 사방에 돌리어 독자적인 의병부대의 출범을 사방에 알리는 한편, 의병부대의 주요부서를 정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주요 부서와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의병장 심남일

선봉장 강무경 장인초

중군장 안찬재 박사화

후군장 노병우 나성화 최우평

도통장 김도숙

-이하 생략-

의진의 편제와 직책이 확정되자 의병장 심남일은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였는데 제1조에는 의병의 지휘체계와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혀놓았고, 제2~6,8조에서는 의병들이 일으킬 수 있는 각종 민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다음 그것을 어기면 처벌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는, 이들이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역점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조는 국가 재산 보호에 관한 것이고, 제9조는 전투시 지켜야 할 사항이며, 마지막으로 제10조는 의병의 식사시간의 준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의병장 심남일은 주민의 보호를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들의 안민의식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의병장 심남일은 안민적 의병활동을 크게 강조하여 민폐를 끼치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히 다스렸다. 일제측 기록에서도 심남일은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킨 의병장으로 높이 평가함으로써 이른바 그가 결성한 남일파는 더욱 이름을 떨쳤다.

독자적인 의병부대로 출범한 '남일파'는 일본의 국권 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 관리의 임명, 군대해산과 황제 양위 등에 대하여 매우 강력히 반발하였다. 다시말해 남일파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하여 국권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한 활동 방향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친일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1908년4월심남일은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통문을 게시하였는데, 군수, 세무관 그리고 각 면의 공전영수원들이 거두는 세금이 일본군의 군사비에 충당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한다면 왜적과 같은 세력으로 간구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즉 그는 주민의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고,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자위단과 한인 헌병보조원들도 일본세력과 함께 제거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둘째, 이들은 의병을 빙자한 도적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이들은 주민들로부터 한층 신뢰받는 의병부대로 인식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셋째, 반일투쟁활동, 즉 일본세력을 구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8~9년 사이에 전라남도 나주와 강진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의 중남부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성장하였다.

남일파는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에 걸쳐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심남일은 각 의진 간의 연합작전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의진 간의 연합을 주장하였는데, 전남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안규홍 의진, 서부지역의 전해산 의진과도 연합을 주장하여 하나의 연합체인 호남동의단을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1개 의병부대로 조직된 호남동의단의 맹주에는 의병장 전해산을 추대하고, 자신은 제1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전해산 의진과 안규홍 의진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항일투쟁을 선도함으로써 이들은 호남지역의 3대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심남일의 존재는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고,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는 심남일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심남일과 전해산, 안규홍 등의 근거지를 찾아내기 위해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주된 목적은 심남일을 죽이는데 있다'라고 함으로써 당시 일본측이 심남일의 제거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이에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9년 7월경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하고서 활동을 일시 중단하였는데 중군장 안찬재는 의병해산에 반대하여 보성에서 활동하던 임창모와 합세하여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하였다.

의병장 심남일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다.심남일 등은 광주감옥에 갇혀 일제의 모진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심남일은 그의 굳건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없는 의병들이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말하였다. 이후 심남일은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어 1910년 10월 4일 순국하였다.
김성배 기자 / 입력 : 2010년 1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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