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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휴의 양동마을 이야기 2.
김경효 기자 / 입력 : 2010년 11월 15일
이지휴의 양동마을 이야기 2.
|  | | | ↑↑ 양동마을 전경 | | ⓒ GBN 경북방송 | |
[우리선조들의 정원관(庭園觀)은?] 우리 선조들의 정원관(마당인 정원을 바라보는 가치)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선조들은 정원을 조성할 때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 즉 형이하학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하지 않았다.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이 주는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 즉 마음이 풍요롭게 충족되는 수목과 화초를 심어 자신의 마음을 수련 했다.
그러나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경이나 정원의 조성은 눈이 선조들에 비해 그 수준이 미약하다. 비록 식물이지만 그 나무나 화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상징성을 염두에 두는 부분은 약하고 보기 좋은 모습을 먼저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선조들은 나무하나 화초 하나를 심어도 그 식물이 자라나는 과정을 면밀히 분석해 그 과정을 내 인성(人性)에 대입시켜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서양의 미와 동양의 미가 다르고 우리 선조들이 지향하는 미는 다르다.
선조들의 미를 보는 관점은 매우 복합적이며 윤리적, 교육적, 철학적이다. 보통 시골마을의 입구에 정자나무가 심어져 있고 회화나무나, 느티나무, 팽나무를 많이 심었다.
높게 자라고 가지가 넓게 퍼져서 그늘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더운 여름 날 촌노들이 모여 앉아 막걸리 한잔 하면서 동네 여러 일들과 여론을 만드는 정자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정자나무의 실질적의 역할과 의미는 여러 가지 이다.
선조들은 피부병은 통칭 나병이라 생각했고 그 병은 풍토가 습한 곳에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런 수종은 수분을 가장 많이 빨아올린다고 생각해 그 수종의 나무를 마을 동구에 심어 그 마을의 습기를 빨아 하늘로 증발시켜 토질을 건조하게해 나병(문둥병)을 없게 해 달라는 염원의 뜻과 예방의 뜻, 무속의 뜻이 더 강했다. 대문 앞 출입로 전면에는 뽕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았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귀신이 부르는 것은 대나무의 흔들림이고 그 귀신을 쫒아버리는 것은 뽕나무나 복숭아나무의 회초리 때문 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귀신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좋으나 조상의 신마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담장 안이나 울타리 안에는 향나무를 심어 두었다. 제사나 고사를 지낼 때 제일 먼저 분향(焚香)을 하는 이유는 신을 불러 드리기 위함이다. 대문 앞에 뽕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았기 때문에 조상의 신이 무시로 들어 올 수 있고 들어온 조상의 신이 머무르게 하기 위해 향나무를 심었고 조상신이 집안에 머무른다고 생각하면 남정네들이 경거망동하거나 난잡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뒤 쪽 비탈진 곳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일본에서는 지진이 발생하면 대나무 숲으로 피하라고 한다. 대나무는 뿌리가 지네발 같이 자라며 땅 속에서 그물망 같이 퍼져나가기 때문에 흙의 붕괴를 방지한다.
한옥은 온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화목(火木)이 많이 필요했고 집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 화목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장마철에는 비탈진 곳은 무너지기 십상이기에 대나무를 심어 비탈의 붕괴를 방지했다.
대나무는 밀집하여 자란다. 도적이나 들짐승들은 후미진 은밀한 곳으로 침입한다. 도둑이나 들짐승들이 들어올 때 대나무 숲을 헤치며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기척이 난다.
또 대나무를 베고 침입을 하려고 하면 자른 면이 날카로워 밟으면 상처가 나고 도망하기 힘들기에 주인은 예방책으로 심은 것이다.
대나무는 번식력이 강해서 정원에 심으면 정원을 망칠 수 가 있다. 정원에 심는 대나무는 번식력이 비교적 약한 신우대의 일종인 오죽을 심어 선비의 지조와 절개 그리고 마음을 비운다는 것을 생각했다. 오죽헌의 오죽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묘 앞이나 사당 앞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배롱나무는 목 백일홍이고 중국에서는 자미화(紫微花)라 한다. 황제가 내려주는 꽃인 어사화(御史花)를 상징한다.
양반이 아니면 어사화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이 나무를 심어 우리 조상은 양반이었다는 표시를 했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나무껍질을 스스로 다 벗어버려 속살을 다 내다보인다.
즉 숨기는 것이 없다. 즉 깨끗한 선비였다는 자부심을 나타낸 것이다. 배롱나무는 안채나 집 뒤쪽에 심지 않고 사랑채나 정자에서 눈길이 가장 많이 가는 곳에 심었다. 또 다른 3가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꽃의 색이 붉은 색이기에 선비의 정열을 상징했고 100일 동안 꽃잎이 피어있는 꽃은 드물다. 끈기 있게 피어있다는 의미 곧 선비들의 학문에 대한 끈기를 나타냈다.
배롱나무는 유목(幼木)일 때는 껍질이 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해 마다 스스로 껍질을 벗어내 자기 몸을 스스로 다스린다. 사람도 어릴 때는 수신(修身)을 잘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학문을 하다 보면 수신을 하게 된다.
식물도 스스로 자 기 몸을 닦아 내는 것을 보고 인간으로써 몸과 마음을 닦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배롱나무는 가지가 꾸불꾸불하게 자라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가지가 서로 붙어 연리지(連理枝)를 가장 많이 형성한다.
연리지는 화목, 화평, 협동을 상징한다. 선비들은 학문과 윤리에 집중 하다보면 내외간(內外間)의 관계가 규범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외간에 냉기가 돌 수 있다. 배롱나무의 연리지를 보면서 가정을 화평하게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 것이다.
집의 담장에 바짝 붙여 회나무(檜木)를 심는다. 회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자수이다. 서원이 있는 곳에 회나무를 많이 심는 이유는, 즉 이 집에는 학자가 사는 집이라는 상징이었다. 학자가 있는 집이라 표하면서 학문을 게을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또 괴목(槐木)이라고도 하고 뜻은 나무에 귀신이 붙어있다는 뜻이다. 대문 앞에 뽕나무나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았기 때문에 잡신이 다 들어 올 수 있기에 이 나무를 심어 다른 잡신들은 그기에 붙어 집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회나무는 담장 안에 세 그루 이상은 심지 않았다. 학자의 최고의 명예는 정승이 되어 자기가 배우고 닦은 이상을 세상에 펼쳐 보는 것이다, 정성은 3 정승뿐이다, 그래서 3그루 이상은 심지 않았다.
|  | | | ↑↑ 양동마을 단풍나무 | | ⓒ GBN 경북방송 | |
안방 앞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석류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석류는 벌어지면 석류 알이 많기에 다산을 상징한다. 여인들은 시집와서 자손을 이어야 했고 그래서 이 석류를 보고 잉태하기에 정성을 들이라는 것이다. 자손이 귀한 집에는 비록 口자 형의 집이라도 안방 앞에 석류나무를 심었다.
口자형 집 안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口안에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면 곤(困)이 되고 그 안에 나무를 심어 크게 자라면 집의 기반을 흐트러뜨릴 뿐 아니라, 밤에는 부딪히거나 받쳐서 상처 나기가 쉽기 때문에 심지 않았다.
또 대문이나 출입로 앞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문(門)앞에 나무를 심으면 한(閑)이 되기에 한가로운 것은 좋으나 모든 일을 등한이 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덕 한 쪽이나 마당의 한 곳에 사철나무를 심어 선비의 지조를 감상했다. 사철 푸르기 때문이었다.
담장 안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행나무나 호두나무를 심지 않았다. 과육(果肉)이 썩어서 먹는 씨앗은 자손에게 해를 끼친다 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집은 내 몸이라 생각했고 집을 팔아 이득을 남기면 내 몸을 팔아 이득이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은 당연히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었다.
자손에게 해를 끼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열매가 익으면 냄새가 흉할 뿐 아니라 잘못 만지면 피부병에 걸린다. 호두나무는 과육(果肉)이 섞으면 그 씨앗의 모습이 사람의 두개골과 같다.
후손 중에 반드시 정신질환자가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담장 안에 특히 심는 것을 금기시 했다. 이렇게 나무 한 그루, 화초 하나마다의 상징성을 스스로 느껴서 배우고 실천하도록 하며 가정의 안녕을 도모한 것이었다.
둘째. 우리 선조들은 비록 자기 땅이라도, 집 근처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담장의 밖에 둔다. 경치가 수려한 부분을 담 안에 두지 않는 이유는 자연은 나 혼자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와서 감상하고 느끼고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생활이 보장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땅에 울타리를 만들거나 담장을 쌓았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혼자만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 사상을 가졌던 것이다.
셋째. 포괄적차경(包括的借景)이다, 차경은 경치를 빌려오는 의미다. 다른 나라에도 조경을 할 때 차경의 의미를 적용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우리나라의 차경보다는 국지적차경(局地的借景)이거나 제한적차경(制限的借景)을 적용한다.
우리 선조들의 차경은 포괄적이다. 아침에 해가 뜨면 내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을 내 마당에 빌려와 내 정원의 구성요소로 삼았다. 때문에 우리의 정원은 중국의 장원 보다 더 넓어진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모든 산천이 내 정원이고,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 새 들이 하늘을 날라 가는 풍경, 강물과 개울물이 흐르는 모습, 농부가 농사를 짓는 모습, 구름이 하늘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풍경, 이 모든 것이 내 정원의 풍경으로 끌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지 마을인 하회마을이나 경주 교동 한옥촌에 가면 담장이 높다. 바로 앞에 집들이 있어 풍광이 막히기 때문에 빌려 올 경치가 없었다.
그러나 양동마을 같이 언덕진 곳에 가옥이 있는 마을은 가옥의 전면에 담이 없거나 눈썹 담이라 하여 아주 담장이 낮아야 한다. 바로 밑에서 부터 모든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의 정원관은 단지 정적인 풍경만 추구하지 않고 동적인 모습도 내 정원의 한 구성요소로 보았다.
우리 선조들의 정원관은 매우 포괄적인 것이었다.
|  | | | ↑↑ 양동마을 이지휴 선생 | | ⓒ GBN 경북방송 | |
양동마을 이지휴 선생의 이력.
주소.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43번지
1949년 양동마을 생 국민은행 22년 근무 Sun trading L.T.D 중역으로 1992~98년 Cambodia 근무. 2004년 현대시문학 자매지 현대인 등단 현 양동마을 문화관광해설사(경주지역)로 봉사. 전통주 송곡주제조 기능보유자. 현 경북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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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효 기자 /  입력 : 2010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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