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휴 양동마을 이야기 6.
[사당(祠堂)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김경효 기자 / 입력 : 2010년 12월 15일
[사당(祠堂)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  | | | ↑↑ 이지휴선생 | | ⓒ GBN 경북방송 | |
|  | | | ↑↑ 사당 | | ⓒ GBN 경북방송 | |
옛 조상들은 신(神)에게 바치는 음식과 조상에게 바치는 음식은 땅에 두고 만들지 않았다. 땅에서 음식을 만들면 정성(精誠)없고 불경(不敬)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방이나 마루처럼 정결한 곳에서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했다. 규모가 있는 집 에서는 제식청(祭食廳)을 만들어 제사 음식을 만들었고 아이들이 보고 배우게해 세상을 살아가면서 충효(忠孝)를 다 하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묘우(廟宇)를 짓고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고 받들어 모시는 풍습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시대 남해왕이 시조묘(始祖廟)를 짓고 참배했다는 기록 등 여러 번 시조묘(始祖廟)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즈음에서 부터 묘우를 짓고 정성을 다해 조상에게 알묘(謁廟)한 것을 볼 수 있다.
|  | | | ↑↑ 포은 정몽주 영정 | | ⓒ GBN 경북방송 | |
그러나 고려시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당을 건축하지 않았고 신사(神祠)를 두어 집을 보호했으나 고려 말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이 주자가례집(朱子家禮集)에 따라 묘우(廟宇)를 설치하는 것을 권장해 사당을 짓기 시작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대부(士大夫)부터 일반 평민들까지 사자(死者)의 삼년상(三年喪)이 끝나면 집의 대청이나 적당한 곳에 신주를 모셨다.
고례(古禮)에는 사당(祠堂)을 종묘(宗廟) 또는 예묘(禮廟)라고 칭(稱)했으나, 남송시대(南宋時代) 회암(晦岩) 주희(朱熹)선생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사당(祠堂)이라 칭한 후로 일반적으로 왕실(王室)의 종묘(宗廟)와 구별해 통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고대 부터 사당이 있어서 왕가의 전례(典禮)로부터 일반 가정에서 행하여야 할 절차가 정해져 있었다.
사당의 배치는 사자좌선(死者左先)이라 해 정침(안채)의 좌측에 배치했다. 즉 동쪽에 위치한다는 뜻이였고 이기철학(理氣哲學)의 논리로는 사당은 체(體 )즉 몸이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 사당을 먼저 건축하고 용(用)인 살림집을 짓게 했다.
|  | | | ↑↑ 종묘 | | ⓒ GBN 경북방송 | |
|  | | | ↑↑ 서울문묘 | | ⓒ GBN 경북방송 | |
|  | | | ↑↑ 임씨가묘 | | ⓒ GBN 경북방송 | |
근본인 몸을 먼저 건축한다는 의미였고 유가(儒家)에서는 왕실의 사당을 종묘(宗廟)라 불렀고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했고 가정집의 사당은 가묘(家廟)라 했다. 세분(細分)하면 부조묘(不祧廟)와 가묘(家廟)와 감실(龕室)로 나누었다.
영남지방에서는 가묘의 사당문은 하나로 했고 단청(丹靑)을 하지 않았다.
사당은 사대봉사(四代奉祀)하는 조상신의 패(牌), 즉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이었다. 사대봉사가 끝나면 신주를 묘 앞에 매장하고 고유(告諭)를 한 뒤 더 이상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았다.
|  | | | ↑↑ 성남부조묘 | | ⓒ GBN 경북방송 | |
부조묘(不祧廟)는 사당의 문이 3개 이상이고 단청을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라 했다. 사대봉사가 끝나도 조상의 신의 패 즉 신주를 매장하지 않았고 계속 제사를 지내냈으며 이곳에 모시는 조상 신의 패는 위패(位牌)라 했다.
불천지위(不遷之位)는 조상의 신의 패를 모시는 뜻이고 줄여서 불천위(不遷位)라 했으며 각 가문의 대종가(大宗家)에 가면 불천위대제(不遷位大祭)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천위도 세분하면 3가지 품격(品格)이 있다. 국불천위(國不遷位)와 도불천위(道不遷位)와 사천불천위(私薦不遷位)로 구별 된다.
국불천위는 나라를 대표하는 양반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분이거나 사람이 죽거나 역적으로 몰렸다가 신원이 되었을 때 왕이 직접 불천위로 모시라고 한 사람을 말하고 국불천위의 기일(忌日)에는 조정에서 제사음식의 재료를 보냈다. 보낼 때 육류는 피가 마르지 않는 것을 보냈고 갓 잡은 신선한 것을 보냄으로 그 만큼 존경 받아야 할 분이란 뜻을 표했다.
조선 500년 동안 국불천위의 명예를 가진 가문은 79위 뿐 이다. 이를 통해 대단한 자부심(自負心)과 명예심(名譽心)을 가진 가문이 되었다. 도불천위, 도반, 향반은 요즈음의 시대로 본다면 학계(學界)나 정치계(政治界)등 즉 유림(儒林)에서 고인(古人)의 생전(生前)에 이룬 업적(業績)이 지대(至大)하니 불천위로 모실 수 있도록 상소(上疏)를 올려 왕(王)의 허락(許諾)을 받은 분들 이었다.
부조묘의 사당문은 3개 이상인데 문의 용도가 틀리기 때문이다. 가가예문(家家禮文)이지만 보통 우측으로부터 입주(入住), 납주(納住), 출주(出住)라 한다. 입주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위패를 모시러 갈 때 주제관(主祭冠) 즉 종자(宗子)가 맨 앞에 서고 신위(神位)를 모실 분이 그 뒤를 따르고 여러 제관(祭冠)들이 서열(序列)에 따라 들어가는 문(門)이다.
납주(納住)는 신문(神門), 또는 신도(神道)라 해 신(神)만이 다니는 문이기 때문에 주재관이 앞서고 신위를 모시는 사람 뒤따라 나올 수 있으며 다른 제관들은 다시 입주로 나온다. 제사가 끝 난 후에 신위를 다시 사당에 모시기 위해 옮길 때 주재관과 신위를 모신 제관 이하 서열에 따라 납주 앞에 가서는 주제관과 신위를 들고 있는 제관만 납주로 들어가고, 다른 제관들은 입주로 들어갔다가 자기 자리에 모신 후에는 모두 출주로 나왔다.
가정집, 특히 양반의 집에 묘우가 없을 때는 조상의 신의 패를 방치 할 수 없었기에 어디엔가 모셔야 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통 사랑채의 대청이나 사랑방의 장방에 설치해 검은 칠을 한 뒤 조상의 신주를 모셨고 이것을 감실이라 한다.
이렇게 격식과 정성을 다 하는 것은 가문의 명예를 지킴과 동시에 내가 근본을 잊지 않고 조상에 대한 예와 정성을 다 함으로서 나의 후손들도 스스로 보고 배워서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했다.
[조선시대의 범절을 지키는 집에는 남녀가 출입하는 문이 다르다]
|  | | | ↑↑ 사랑채 | | ⓒ GBN 경북방송 | |
조선시대, 특히 유가의 집에는 남자가 출입하는 문은 사랑채의 정면에 있었다. 그래서 정침의 좌편에 있는 사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이 출입하는 문은 좁고 문틀이 하나기 때문에 협문(夾門) 또는 일곽문(一廓門)이라 했고 반대로 남자들이 출입하는 문은 대문(大門)이라 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여인들이 출입하는 문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과거 남자는 임진왜란 이후 관례를 하고 장가를 가서 초혼례(初婚禮)를 마친 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여인을 데리고 왔다.
가끔은 처가에 방문을 했지만 처가 가족에 대한 내력 및 처의 조상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자기 조상에 대한 내력만 알면 되었기에 처가의 사당을 보지 않아도 되는 쪽에 문이 위치했다. 오죽하면 여자는 항렬이 없다거나 처삼촌 벌초 하듯이 한다 라는 말은 처가를 대충대충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조선의 여성들은 계례(笄禮: 비녀를 꽂는 것)하면 시집을 갔는데 평생 모셔야 할 새로운 조상의 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과 나와의 관계는 물론 기일(忌日)과 무엇을 한 사람인지 모두 알아야 했다. 그러나 옛날에는 결혼한 뒤 바로 조상님에 대해 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출입을 할 때마다, 눈으로 보이게 하는 이유는 항상 알려고 노력하라는 의미였다. 시집살이가 너무 즐거우면 즐거움에 도취되어 친정 조상의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고 또 시집살이가 너무 어려우면 살아가기가 바빠 친정 조상의 은혜를 생각 할 틈이 없을 수 있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당이 눈에 자주 보이면 망각했든 친정 조상이 상기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은혜도 기억하여 질 것이라 생각했다.
현대는 각 가정마다 냉장고나 기타 음식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잘 구비 되어 있고 또 가까운 슈퍼에 가면 인스턴트 식품이 잘 준비되어 불시에 여러 손님이 내 집을 찾아와도 별 무리 없이 범절에 맞게 음식을 접대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시설들이 없었기에 보통 손님들이 방문할 날짜를 미리 기별을 했다. 그러면 그 날에 미리 우리 가문의 범절과 법도에 맞게 음식을 준비해 손님을 접대했다.
|  | | | ↑↑ 사랑채문 | | ⓒ GBN 경북방송 | |
그러나 불시에 오는 손님이 있으면 난감했다. 먹던 음식을 그대로 접대할 수도 없고 가문의 범절도 차려야 했기에 이웃집에서 음식을 빌려오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문으로 가지고 오면 손님도 미안하게 되고 대접하는 이도 민망하니 그 때 여성들이 이용하는 쪽 문을 이용해 조달하면 무리가 없었다.
이지휴 선생의 이력. 주소.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43번지
1949년 생 국민은행 22년 근무 Sun trading L.T.D 중역으로 1992~98년 Cambodia 근무. 2004년 현대시문학 자매지 현대인 등단 현 문화관광해설사(경주지역) 현 경북문협 회원 본 내용의 저작권은 필자에 있습니다. |
김경효 기자 /  입력 : 2010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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