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강기동 선생)
윤승원 기자 / gbn.tv@hanmil.net 입력 : 2011년 01월 31일
선생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했으며 1909년 1월부터 1911년 2월까지 약 2년여에 걸쳐 반일투쟁을 전개하다 일제에 의해 사형 순국한 선생은 의병에 투신하기 이전에 의병을 진압하는 일본 헌병의 보조원이었다.
헌병보조원은 1908년 6월 도입된 것으로, 선생은 일본어에 능통한 것을 계기로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경기도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09년 고안헌병분견소에 의병들이 수감되고, 의병의 실상을 접한 선생은 자신도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09년 1월 15일, 옥문을 부수고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을 탈주시킨 후 총과 탄환을 탈취해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 의병으로서 대일항쟁 대열에 동참했다.
주요공적으로는 - 일제 헌병보조원 재직 시 투옥된 의병을 탈옥시킴 -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경기도 양주․포천에서 활 - 북간도로 망명하다가 원산에서 체포되어 사형 순국
창의원수부는 1909년 1월 한 달 동안 포천·양주지방의 산악을 배경으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헌병보조원 시절의 정보를 바탕으로 효율적 군자금 확보책과 일본군대·헌병·경찰의 정보를 제공해 창의원수부의 반일투쟁에 많은 공헌을 했고, 이러한 공로로 투신한 지 1개월 만에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10월, 일본군의 집중적인 ‘의병토벌’이 진행되자, 선생은 연기우 의병부대와 연합부대를 구성하고 전투를 전개했다. 대규모 전면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해 나가며 ‘분합작전’을 계속해 나가자, 일제는 현상금을 내걸고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이듬해 9월부터 40여 일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해 활동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에 선생은 독립군으로 전환해 대일항전을 계속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을 결심했다.그러나, 1911년 2월 북간도 방면으로 이동하던 도중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체된 선생은 4월 17일 서울 용산 일본군 형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윤승원 기자 / gbn.tv@hanmil.net  입력 : 2011년 01월 31일
- Copyrights ⓒGBN 경북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포토뉴스
토마토 거리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
|
감은사로 간 시인류현주답사객으로 보이는 45명을 태운 버스가주차장으로 ..
|
최동호 교수의 정조대왕 시 읽기
정조는 1752년 임신년에 출생하여 영조 35년 1759년 기묘년 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