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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낙동강전투가 미육군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9월 11일, 낙동강전투와 정전협정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택사스A&M대 린 교수 기조발표..낙동강전투가 미육군에 미친 영향 밝혀
낙동강전투 참전 美용사 초청 감사행사도 가져..참전용사 증언, 감사패 전달 등

진혜인 기자 / gbn.tv@daum.net입력 : 2013년 09월 11일
ⓒ GBN 경북방송
학술세미나에는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김요환 육군제2작전사령관, 원홍규 육군3사관학교장, 노석균 영남대 총장, 송필각 경상북도의회 의장, 박희모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장, 대구경북 보훈단체장, 국내외 6‧25참전 용사, 연구단체, 전문가, 대학생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6․25전쟁 당시 망명정부 수립을 논의할 정도로 위급했던 전황에서 국군과 UN군의 투혼으로 방어선을 지켜냄으로써 반격작전과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발판을 마련함은 물론, 단숨에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로, 공산세력의 팽창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최후 저지선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회식에 이어 제1부 행사에서는 한국전 당시 낙동강방어선 전투에 참전했던 미 참전용사의 전쟁당시의 생생한 전투경험을 전하는 증언이 이어졌다.

1950년 8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제9야포대대 포병장교로 참전했던 벤자민 케스너(85세, Benjamin Kessner)씨는 칠곡 다부동전투에서 펼쳐진 최초의 전차전 볼링앨리전투, 한국의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과의 인연, 북한 운산지역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철원까지 후퇴에 이르는 무용담을 전했다.

또 한명의 참전 증언자인 헤수스 로드리게스(81세, Jesus Rodriguez)씨는 미군 제24사단 19연대 소속으로 낙동강방어선 전투에 참전한 美용사로 북한군 6사단의 공격을 저지해 부산지역 항구를 지켜내는데 공헌했고, 수원, 서울을 거쳐 평양전투까지 참전하였으며, 그 공로로 은성훈장, 명예상이훈장 등 4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한편, 이날에는 참전증언자를 포함하여 美참전용사 여섯분에게 참전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감사패와 기념품 전달, 감사편지 낭송 등 보은의 시간도 마련했다.

이어서 “낙동강전투에서부터 핵전쟁 까지 : 미 육군에 대한 한국전의 영향(From the Nak-Dong River Battle to the Nuclear Battle : The Impact of the Korean War on the US Army)”이란 주제로 택사스 A&M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브라이언 맥캘리스터 린 교수가 기조발표를 했다.


ⓒ GBN 경북방송
이번에 발표한 린 교수의 논문은 낙동강방어선 전투가 미 육군에 미친 영향에 관한 최초의 연구로서 미 육군의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전환하는데 낙동강전투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과 미 육군의 교육훈련에 반공과 같은 이념이 교리화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미 육군이 대규모 미래전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도 낙동강전투가 영향을 줬다고 밝힌 린 교수의 논문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간과했던 측면에 관한 새로운 주장들을 담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격적인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된 2부행사 1세션에서는 허만호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6‧25전쟁 휴전회담에서의 군사분계선 문제 : 불가역적 적대자간의 협상에서의 부정합”과 문성욱 전 국방부 군비통제차장의 “정전협정체제의 국가안보적 함의”를 주제로 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2세션에서는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사부장의 “6‧25전쟁기 경북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와 그 의미”와 노양규 영남대 군사학과 교수의 “낙동강전투 승리의의와 국가방위 중심군으로서 육군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자로는 주한미군사령부 스티븐 타프(Stephen M. Tharp)와 국민대 교수인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Lankov) 교수 등 국내외 전문가 8명이 참석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 초청된 6명의 해외 참전용사들과 동반가족들은 육군3사관학교 사관생도 열병식 및 퍼레이드 참석, 대구경북의 문화유적 탐방, 낙동강전투 전승기념행사 참석 등 9월 13일까지 초청일정을 이어간다.

원홍규 육군3사관학교장은 6․25전쟁 63주년과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한 이번 국제학술세미나는 북한 공산세력의 침략을 저지하고 우리 국군이 궁극의 승리를 거두는데 그 발단이 된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 육군이 거둔 승리의 의미를 재조명하면서, 동시에 정전협정이 갖는 국가안보적 의미를 논의하는 장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강조했다.

김관용 경상북도지사는 이번 세미나를 위해 참석한 헤수스 로디르게스(Jejus Rodriguez) 씨를 비롯한 6분의 해외참전용사의 재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이분들의 희생 위에 대한민국이 오늘의 번영을 이루어 냈다고 경의를 표하며,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자유와 민주, 평화의 가치를 다시 상기하고, 6‧25전쟁의 승리를 견인한 낙동강전투의 의의와 교훈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국제학술세미나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2010년부터 육군 3사관학교가 주관해 올해로 4회째를 맞고 있다.

ⓒ GBN 경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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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발표내용 요약

주요 발표자

가. 린(Linn, Brian McAllister) 교수
- From the Nak-dong River Battle to the Nuclear Battle : The Impact of the Korean War on the US Army
낙동강 전선에서 핵전쟁까지 : 6․25전쟁이 미군에게 미친 영향

1) 학계에 새롭게 발표되는 논문 내용

린교수가 발표하게 될 논문은 낙동강방어선 전투가 미 육군에 미친 영향에 관한 최초의 연구(기존의 연구들은 전투수행 자체에 관하여 다루었으나 한국전쟁이 미 육군의 변화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음)이며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이 연구는 선행연구에 대해 분석하여 기존 역사학자들의 해석을 논박하는 내용이 있다.

- 낙동강 전투가 미 육군이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 낙동강 전투로 인해 미 육군의 교육훈련에 반공과 같은 이념이 교리화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작전(낙동강 방어전)의 결과로 인하여 미 육군이 대규모 미래전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미 육군이 새로운 무기체계, 전투조직, 교리를 개발하게 되었음을 규명하였다.

- 한국전쟁에 대해 실상 미 육군에서는 그다지 많은 연구가 수행되지 않았으며, 이 논문은 지금까지 많은 역사학자들이 간과했던 측면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포함하고 있어 가치가 있다.

2) 린 교수의 프로필 및 한국전쟁 관련 연구실적
린교수가 기존에 발표한 논문 중에 주목할 만한 연구업적은 논문 2편, 책 3권을 들 수 있다.
- 논문: “미군의 전쟁관”(2011, 미인문과학저널) ☞ 미국 전체적으로 가장 주목받은 논문 중 한 편임
- 논문: “미군의 전쟁방식 재고찰”(2002, 미 軍史학회지) ☞ 탁월한 논문으로 Moncado prize 수상
- 저서: 『필리핀전쟁, 1899-1902』(2000, 캔자스대출판사) 미군사학회 우수도서상 수상, 미육군참모총장의 필독서 선정, 미공군참모총장 필독서 선정
- 저서: 『제국의 수호자: 미육군과 태평양, 1902-1940』(1997, 노스캐롤라이나대출판사) 2013년 미군사학회 우수도서상 수상, 육군軍史재단 우수도서상 수상, Choice선정 우수학술도서상 수상
- 저서: 『전쟁의 메아리: 육군의 전쟁수행 방식』(2007, 하바드대출판사) 미육군대학, 미지휘참모대학 교재로 사용 중

나. 허만호 교수
- 6․25전쟁 휴전회담 분석 ; 불가역적 적대자 관계에서의 군사분계선 문제 -

6.25전쟁 휴전협상 시,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는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간의 중요한 대립점이었다. 그런데 6.25전쟁의 경우,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못 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 하겠다. 상세한 내부 정보를 밝혀내기 힘든 국제협상에서는 외부에 나타난 지표(external indicators)나 간접적 측정치(indirect measures)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접근이 협상의 제 국면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대체할 수는 없겠으나, 때로는 아주 적절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본 연구는 협상 일반론을 개괄하고, 이를 준거로 하여 군사분계선 문제를 다루었다.

본 연구에서는 군사분계선 설정과 관련하여 특히, 유엔 측이 제안했던 북한의 해상 봉쇄 해제와 육지 분계선 북상(北上) 제안이 거부되고 해상 분계선 문제가 현재와 같이 귀결되게 된 과정과 원인을 협상론의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따라서 의제 설정, 협상과정과 종결을 분석하면서 이에 지배적으로 작용한 미국의 종전정책을 동시에 살펴보았다.

미국정부가 NSC 48/5를 1951년 5월 17일에 채택하면서 결정하게 된 전쟁제한정책은 결국 유엔군 측으로 하여금 군사분계선 문제와 관련하여 공산군 측으로부터 ‘38선’을 ‘휴전선’으로 양보 받고 유엔군은 북한의 영공과 해상에서 보상 없이 철수하게 했다. 그런데 유엔군 측은 휴전협상을 지나치게 서두른 나머지 해상분계선과 관련하여 협상론의 관점에서 최악의 실책을 범하였다. 1952년 1월 29일과 그 다음날에 있었던 휴전회담 참모장교회의에서 공산군 측이 ‘황해도와 경기도의 경계선이 해상의 분계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유엔군 측은 서해5도를 지키기 위해 이를 부정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당시 제해권을 갖고 북한의 해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을 협상력으로 활용하지 않고 본회의에서까지 계속해서 ‘합의된 군사분계선은 본토(mainland)에서 끝나고 해상으로 연장되지 않기 때문에 해상에는 합의된 군사분계선이 없고, 그 어떤 선도 합의된 것이 없다’며 수세적인 대응만 하였다. 특히, 한강하구 문제는 양측의 민용선박이 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개방수로(open water way)로 비교적 쉽게 합의되었으나 1954년 7월 4일이래 계속된 북한의 도발로 조기에 유명무실해지고 북한의 간첩 남파 통로로만 활용되게 되었다. 휴전협상이 협조적 경쟁자들(cooperative antagonists)간에 이루어졌던 진정한 협상(true negotiation)이 아니라 불가역적 적대자들(strident antagonists)간에 이루어졌던 협상인 만큼 강력한 이행장치를 마련했어야 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이와 같이 귀결한 데에는 휴전협상 대표단 구성과 운영방식에도 원인이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 측의 대표성 결여와 군사분계선 문제를 다룬 제2의제와 구체적 협의를 다룬 제3의제 분과위원회에서 공산측에서는 북한 대표가 참여하였으나 한국 측에서는 아무도 배석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한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 문성묵 박사
- 정전협정체제의 국가안보적 함의 -


정전협정체제는 1953년 이후 60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재발을 방지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물론, 북한이 제2의 6.25를 감히 시도하지 못한 것은 한미연합방위체제에 기초한 강력한 억제력 때문이지만, 정전협정체제는 이러한 한미동맹의 명분을 제공해 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국가안보적 의미가 있다. 그 중요성을 정리한다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전협정은 역사적으로 한미동맹이 태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전협정이 있었기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나올 수 있었다. 또한 정전협정체제는 주한미군 주둔과 한미연합방위체제 유지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둘째, 정전협정체제의 감독기관인 유엔군사령부가 존속할 수 있는 법적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1950년 창설된 유엔군사령부는 6.25 전쟁 당시 공산군의 격퇴와 자유민주 수호 임무를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정전체제를 유지하며 유사시 전력제공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셋째, 정전협정체제는 남북기본합의서 체제와 함께 남북관계를 규율하고 불가침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는 준수되어야 하며, 현 정전협정체제를 공고한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이다.

이러한 안보적 함의를 인식하고 있는 북한은 1990년대 초반부터 정전협정체제 무력화 기도를 자행해 왔다. 급기야 금년 3월에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유엔대표부를 통해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그만큼 정전협정체제가 국가안보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상태가 구축되는 그 순간까지 현 정전협정은 되어야 하며, 정전협정체제도 정상적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아울러,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된 신뢰구축 조치들이 성실히 이행되고, 비핵화공동선언에 따라 핵문제도 해결되어야 지속가능한 평화상태도 가능하며, 현 정전협정체제를 남북 간의 공고한 평화협정체제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참전용사
가. 벤 케스너(Benjamin Kessner)

1950년 8월부터 1951년 10월까지 한국전쟁에 포병장교로 참전한 케스너는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직까지 생생하기 기억하며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케스너는 1950년 8월 부산에 도착하여 제9야포대대에 배속되었다. 9야포대대는 한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1951년 1월까지 수행하였다. 특히 대구-부산지역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단 케스너는 범상치 않았던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1950년 8월 12일부터 8월 25일까지 볼링앨리(Bowling Alley) 전투에 참전한 케스너는 10명의 미군 병사들을 이끌고 북한군 50명을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첫 전투에서 단 한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북한군을 전멸시킨 케스너는 지휘관으로부터 용기(Valor)를 상징하는 “V”자가 새겨진 동메달을 수여 받았다. 이후 150명에 달하는 포병부대를 이끌게 된 케스너는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전, 수원, 평양, 운산을 거쳐서 북한 북부지역까지 진출하였다.

1950년 11월 케스너가 소속된 포병대대는 평양을 지나 북한 운산 지역까지 진출하였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군과 미군은 평양을 지나 철원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케스너는 이 당시를 회상하기를 “한국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중공군이 1950년 11월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보낸 겨울이 내 생에 가장 추었던 겨울이었다. 이러한 추위 속에서 아무런 식량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케스너의 부대는 1951년 12월 31일 진격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서울까지 빼앗기고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철원지역의 철의 삼각지대에서 3개월간 한국군과 미군의 화포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케스너는 1951년 10월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15개월을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케스너의 의무복무 기간은 12개월이었으나, 약 15개월간 자진해서 근무하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었다. 15개월 기간 동안 케스너의 포대원들은 오직 5명밖에 사상자가 없었다. 그의 부대가 부산에서 북한 운산지역, 다시 한강 이남지역까지 철수한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한국전쟁 동안 한국군 1사단을 지원했던 케스너는 1사단에 대해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부대는 부산에 도착했을 때 한국군 1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사단을 지원하면서 상당한 동질감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1사단은 최고의 사단이었고, 이런 부대를 도울 수 있었다는 것에 그는 매우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뛰어난 용기와 전투력을 바탕으로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사단은 미군 어느 부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고, 오히려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북한 운산지역에서 다시 1사단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최고의 부대인 한국군 1사단을 지원했던 일은 우리부대의 최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케스너는 회상하였다.

케스너는 2013년 9월 6·25전쟁 63주년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차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하루빨리 한국과 한국민들의 발전과 번영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있다.

나. 헤수스 로드리게스(Jesus Rodriguez)

로드리게스는 1932년 LA에서 태어나 1949년 6월 22일 17살의 나이로 미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17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극동사령부 소속의 제29 보병연대에 배치 받았다. 이후 오키나와에 있는 캠프에서 주둔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22일 한국의 진주로 파견되었다. 한국에 파견된 로드리게스는 제25사단 25연대에 소속되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참전하였다. 한국에 파견된 지 3일 만에 그는 분대장으로서 부산과 진주지역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써 한국군이 재배치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다. 로드리게스는 갓 훈련을 마친 병사들을 이끌고 북한군 6사단의 공격을 막아내 부산지역 항구를 지켜낸 것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전투”로 표현할 정도로 치열했던 북한군 6사단과의 전투는 게릴라전에 가까웠다. 북한군의 도로 매복과 저격수 운용 등으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이를 극복한 25연대는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그는 이후 수원, 서울 전투를 거쳐서 평양전투까지 참전하였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겪어낸 로드리게스는 1952년 8월 상병으로 퇴역하고 미국 본토로 돌아갔다. 3년간의 군 복무 중에서 2년 이상을 한국전쟁에 참전한 로드리게스는 아직까지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3년간의 군복무 경험에 대한 유공으로 은성 훈장, 명예상이 훈장 등 4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진혜인 기자 / gbn.tv@daum.net입력 : 2013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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