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新羅皇城圖」제작
신라 전성기의 화려했던 모습을 회화로 재현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3년 11월 19일
|  | | | ⓒ GBN 경북방송 | |
경주시는 20일 대회의실에서 문화재관련 전문가, 국․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신라황성도 제작발표회를 개최한다.
지난 2011. 6월 신라황성도 제작에 따른 자문위훤회를 구성하여, 제작에 따른 타당성 및 필요성에 공감하고 경주문화원에 제작을 의뢰하여, 2년 4개월간의 작업을 거쳐 제작을 완성했다..
|  | | | ↑↑ 황성도 이름표기 | | ⓒ GBN 경북방송 | |
이번에 완성된 신라황성도는 규격은 가로5m, 세로 2m에 순지바탕에 금색으로 채색했으며, 일본서기에도 신라를 눈부신 금․은 채색의 나라로 묘사되어 있듯이 번영과 영화의 통일신라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순금바탕에 채색했다.
전체적인 구도는 월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좌측으로는 왕릉 유적지와 오른편으로는 황룡사를 비롯한 헌덕왕릉까지 압축하여 삼국유사의 기록과 현재 발굴 조사된 유구를 중심으로 고증하여 제작했다. (경주시내에는 178,936호. 1360방,55리 삼국유사 권1 기이 진한조)
|  | | | ⓒ GBN 경북방송 | | 자문위원회는 그동안 수차례의 자문회의를 통하여, 역사 및 고지도 등를 최대한 활용하여 사실에 근접한 황성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번에 제작된 신라황성도는 신라천년의 찬란했던 옛 모습을 회화로 재현하여 신라인의 후예로서 역사적 자긍심 고양과 함께 신라의 유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향후 각종 국제행사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활용방안도 강구하여 경주를 세계에 홍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향후 영인본 제작하여 예술의 전당, 화백컨벤션센터 등 적절한 장소에 설치하여 시민들과 관광객들에 볼거리를 제공 할 뿐만아니라, 관광자원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 | | ↑↑ 왕경복원도 | | ⓒ GBN 경북방송 | |
황성도 제작 설명서(보조자료)
일시 : 11월 20일 (수요일) 오후 5시 장소 : 경주시청 대회의실 규격 : 5m x 2m (금박바탕 채색) 제작기간 : 2011. 11 ~ 2013. 11. (만 2년) 제작자 : 손연칠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교수)
신라의 왕도 경주는 2000년 12월 “경주 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나라 문화재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모두 가꾸고 지켜야 되는 범세계적인 역사 도시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월성을 중심으로 한 이곳은 신라 왕족들이 중심생활권으로 추정되어 고대 신라의 성장은 물론 통일 이후 대 재국을 이루는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왕도로서 신라의 정치와 문화 및 사회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요컨대 민족적 힘의 원천은 전통에 대한 우월성의 강한 확신으로부터 출발 한다 할 것이다. 경주는 통일신라의 번영과 당시의 민족사를 발전시킨 위대했던 순간순간의 역사적 사실들이 발현하였던 현장으로, 우리민족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라인들의 역사적 우월성과 그 가치는 민족고유의 특질이 되어 우리에게 지금도 긍지와 자부심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장소성을 누구나 알기 쉽게 회화로 재현함으로서, 현재와 미래의 문화사적 가치와 사상으로 연결시키고, 국내외 관람자들에게 신라인의 후예로서 민족의 권위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삼국유사의 기록과 현재 발굴 조사된 유구를 토대로 여러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다. 통일 신라시대를 일본의 기록에서도 “눈부신 금. 은 채색의 나라”로 묘사되어 있으며, 현재 미국 메트로포리탄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황금의 나라 신라전”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 신라의 번영과 영화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순금 바탕에 동양화의 전통기법인 평원법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금박 바탕은 역사적 고증에서 차후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 될 때마다 다시 금박을 붙여 교정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황성도”의 전체적인 구도는 월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계림등의 역사적 공간과 전랑지 사이의 중심시가지와 상부에는 북천의 건너지역까지 포함하였다. 오른편으로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위치하고 있어 이 일대는 신라 천년 역사가 화려하게 펼쳐졌던 역사의 중심지로서 그림 상부의 오른편으로는 양존사지와 헌덕왕릉 까지를 그렸다. 좌측으로는 구 쪽샘 인근의 왕릉 유적지와 북천인근에 자리한 선덕대왕신종이 걸렸던 봉덕사지 까지를 압축하여 재현하였다.
1985~1993년 월성과 첨성대 사이 구간의 발굴 조사결과, 이 일대에서 대규모 건물지 유구들이 확인되어, 통일신라의 월성과 그 주변은 신라의 중심지로서 궁성 및 각종 중앙 관청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동고분군 동쪽 경계지점에서 확인된 구시설(溝施設)을 경계로 서쪽은 고분군 동쪽은 생활영역으로 구분되는 확연한 양상을 띤다. 황룡사의 창건 시기인 6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식 도성제, 즉 도시계획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 일대가 신라왕경으로서의 발전된 모습을 재현 하였다.
신라에서 중국식의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5세기말부터 6세기초반에 걸친 시점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7세기 중반 선덕여왕 때 첨성대와 황룡사 9층 목탑이 만들어지고 월성에 한정되어 있었던 궁궐의 범위를 벗어나 사방으로 확장하는 등 완비된 도시로서의 기틀이 마련되어 있었다. 7세기 중후반 무렵에는 월지를 포함한 동궁이 확장되어 넓은 지역에 궁성이 확장되었고, 이때를 즈음하여 월성의 북쪽 전랑지에 별궁을 조영하였다. 8세기~9세기 대에는 별궁의 조영과 더불어 연못을 파고 섬을 만들며 수목을 심어 조경한 정원을 갖춘 귀족들의 원지와 함께 30여 군데의 금입택이 자리 잡고 있어서 화려하고 장엄한 왕경을 형성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보이듯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처럼 도시계획에 있어서 사각형으로 계획된 구획 안에는 궁성을 중심으로 사찰 및 금입택과 더불어 본격적인 중국식의 도성제가 받아들여졌다. 도로는 소로[5.5m 내외], 중로[9m 내외], 대로[15.5m~23m 내외]로 구분되며 이러한 도시계획의 흔적은 지금의 경주시의 중심지역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 통일신라기 왕경의 시장은 궁궐이나 규모가 큰 사찰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전국의 중요물자와 멀리 서역의 물자들까지 유동되었으며, 시장을 중심으로 한 왕경 전역은 국내인을 비롯한 서역인·중국인·일본인들로 성시를 이룬 국제적인 도시였다.
중심부분이 된 월성은 총면적 193.845m (약 59.000평)이며 반달모양의 토성이 현재도 남아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피사니사금 22(101)년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이름 하였으며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살았다. 또는 자비마립간 2년(459)년 여름 왜인이 병선 100여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을 애워 싸고는 사방에서 활과 돌을 비 오듯 퍼 부었다. 군사들이 왕성을 굳게 지키자 적들이 물러 갈 때, 군사를 내어 북쪽으로 바다 어구까지 뒤쫓아 갔다.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은 넘었다. 라는 내용이 있으며, 소지마립간9년(487)년 월성을 수축하고, 655년 태종무열왕 때에는 월성내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는 기록이 있다.
월성은 신라멸망 이후 그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성벽일부의 발굴을 시작으로 1984년 월성. 계림. 월정교지. 동궁(안압지) 첨성대등의 역사 유적지를 하나로 묶어 월성대공원 조성계획이 정부에 의해 마련되어 성벽 외곽을 따라 시굴 조사가 이루어 졌다. 조사결과 성벽 외곽 전반에 걸쳐 해자가 확인되었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 되었다. 삼국이 통일 되어, 외부침입의 우려가 사라진 후에는 해자의 방어 기능이 안압지와 같은 조경적 기능으로 대체 된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첨성대와 계림주변지역에 대한 조사에서는 다수의 적심 건물지들이 발견 되어 관청건물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2003년 지표조사를 통하여 자연적 또는 인공적인 월성의 훼손의 심각성을 밝혀내었으며, 2007년 월성내부에 대한 지하 물리 탐사를 실시하여 수많은 건물지의 유구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 한바 있다.
그리고 경주시내에는 17만 8천 구백 36호, 1360방, 55리, 큰 부자가 35구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 진한 조)라거나 예술적 감각과 재능을 겸비한 제 49대 헌강왕(875~886)은 통일신라의 하대 말기.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술잔치를 배풀고 거문고를 타며 좌우 신하들은 가사를 지어 바치며 즐겁게 놀았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 11 헌강왕7년(881) 봄 3월조) 왕이 월성루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장안에 민가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음악 소리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고 “내 들으니 민가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잊지 아니하며, 밥을 지을 때 숯으로 하고 나무로서 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거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경도 내에는 10만대군의 가옥이 있었으며 집과 담장이 연이어 있었고 장작이 아닌 숯으로 밥을 지을 정도로 풍요로웠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거나 , 35채의 금입택이 있었다. (삼국유사 권 1 진한조와 사절유택조)는 내용이 있다. 제49대 헌강왕 때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 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노래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차서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 왔다.(삼국유사 권 2 기이 처용량 망해사조) 또한 주원의 집은 내의 북쪽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삼국사기’ 권10 원성왕 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내용과 지금까지 다리의 유구가 발굴되지 않음에 따라 북천에는 목교만 그려 넣었다.
신라 왕경의 구체적인 실체를 찾고자 한 것은 일본학자인 후지다 모토하루(藤田元春), 가 1929년 큰방이 80間 작은방이 40間이라고 최초 밝힌 것을 필두로,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의 신라 왕경 복원설(1930), 장순용의 방리 구획도(1976), 김병모의 왕경 복원안(1984), 윤무병의 왕경 복원 개념도(1987), 다나까 토시아키(1988), 민덕식의 왕경 복원안(1989), 김한배의 왕경 복원 구조도(1994), 윤무병 안과 후지시마 가이지로 안의 중첩 왕경도를 김경대 복원(1995), 우성훈의 신라도성 발기구획의 범위(1996), 김철수의 후지시마 가이지로 및 한국사(고대편, 1959)를 참조하여 재 구성한 왕경 복원안(1997), 박방룡 왕경 복원안(1998)등 많은 학자들이 실체를 밝히고자 많은 연구들을 계속하고 있다. 본 황성도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의 왕경복원도를 중심으로 여러 문헌등을 참고하여 재현하였다. (별첨 왕경 도 사진3)
자문위원 (가나다 순) 손원조. 경주문화원장(자문위원장)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 임영애. 경주대학교수 석우일. 신라역사과학관장 조철제. 향토문화연구소 최영기.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원장 자료조사 제공 :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3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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