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진의 '역사 산책' (8회)- 신라인들도 곰을 신앙했었다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4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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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요?
네 오늘은 조상들의 문화유산에 보이는 곰 신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특히 초기 신라인들도 곰 신앙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겠는데요. 짐작이 가십니까? 초기신라의 백성들까지 곰 신앙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초기 왕족들이 곰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합니다. 사로국은 주도한 박혁거세 집단은 단군왕검사회의 직계 후손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군왕검사회의 제정일치 문화를 계승하고 있었어요.
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을 남해차차웅이라고도 칭했는데, 이때 차차웅은 제정일치시대의 제사장을 부르던 말입니다. 차차웅이라는 왕호에 대해서 『화랑세기』의 저자인 김대문은 “차차웅 혹은 자충은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그를 외경해 마침내 존귀한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했다(『삼국사기』). 김대성이 차차웅이 무당의 명칭과 관련 있다고 했을 때 무당이라는 표현은 후대의 표현이고, 사실은 그들이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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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유적에서 나온 곰 여인과 곰들(중국인 황강태 소장)
박혁거세를 비롯한 초기왕족들이 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단서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관련 신앙이 한반도로 이동하는 과정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알아보죠.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의 어머니 웅녀는 곰을 토템으로 하던 부족의 부족장이었다. 7회에서 말씀드린 중국 요령성 서부와 내몽골 동부에 있었던 후기홍산문화 유적인 우하량유적지의 여신묘에서는 여신과 함께 여러 토템동물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여신 가장 가까이는 곰 토템 형상물들이 있었다. 이로써 이들이 곰 부족의 영도 하에 뭉쳤던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는 후기홍산문화를 계승하고 있던 이들 지역에서 하가점하층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신화다.
질문하나 해볼까요?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였다면, 다시 말하면 단군이 곰을 토템으로 하던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단군이 주도하던 사회에서는 곰 신앙이 계승되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요. 당연히 곰 신앙이 계승되었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문화에는 곰 신앙의 흔적이 매우 약해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곰 신앙이 단군왕검사회의 주 신앙이 아니었기도 하고, 한반도는 곰 신앙을 지속하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닌 측면도 있었죠. 한반도에는 곰 보다는 호랑이가 더 우세한 힘을 가진 공간이었으니까요. 다음에 호랑이 산신신앙을 이야기할 때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단군왕검사회의 주 신앙이 곰 신앙이 아니었다면 단군왕검사회의 주 신앙은 어떤 것이었죠?
-네 그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한국문화에 전해지는 곰 관련 유물유적에 대해서 알아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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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
그럴까요? -단군신화가 아주 오래된 신화임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있어요.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각저총(씨름총)에 그려진 벽화가 그것이죠.
각처총 씨름도를 보면 왼쪽에 신단수가 있고 그 신단수 아래 양 옆으로 두 마리 짐승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곰이고 왼쪽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호랑이가 보여요. 신단수 옆에는 두 장사가 씨름을 하고 심판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지요.
단군신화를 모티프로 한 벽화임을 알 수 있어요. 이는 고구려에 단군신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또 다른 것이 있나요?
네 『삼국유사』를 보면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나는 대목이 있어요. 유화가 말하죠. ‘자신은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는 해모수를 웅심산熊神山 아래에 흐르는 강가에서 만났다’고요. 이 때 유화가 해모수를 만난 웅심산이 시사하는 바가 커요. 고구려는 맥족 주민을 기반으로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한 나라잖아요. 그렇다면 웅심산은 당시 맥족들의 성산(聖山)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이들 맥족은 후기홍산문화를 주도하던 곰 부족의 후예들이죠. 이는 후기홍산문화 지역에서 활동하던 곰 부족들이 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단군왕검사회가 동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말한다.
한반도에서의 곰 신앙의 흔적은요?
단군신화에 보이는 곰 신앙은 서해안을 타고, 혹은 진한을 거쳐 일본 구주고 들어갔어요. 우선 백제지역인 웅진을 주목해야 해요. 웅진에는 ‘곰 나루 전설이 있어요. 대략 이런 이야기로 구성되었어요.
‘한 남자가 나무하러 연미산에 갔다가 암곰에게 잡혀서 동거를 하게 된다. 몇 해를 사는 동안 새끼 두 마리가 태어났고, 이제 남자가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곰이 자리를 비운다. 그 틈을 타서 남자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도망친다. 이 사실을 안 곰은 두 자식을 물에 던지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배가 뒤집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사람들은 죽은 곰의 영혼이 한을 품어 그렇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그러자 나라에서 사당을 지어 주어 위로해 주었더니 그런 일이 멈추었다.’
곰나루 전설에서 암곰과 사람의 결혼이라는 구도는 단군신화와 동일하지만 자식을 낳은 후 남자가 도망치면서 비극적으로 끝난다는 점은 다르다. 그러나 곰이 죽어서 그곳을 지키는 신이되었다는 면에서는 과거 곰이 가졌던 위상을 물려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서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들 중 상당수는 최근 까지도 곰은 자신들의 형제이며 조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북만주 흥안령 지역에 가면 지금도 ‘아리랑 ․ 쓰리랑’이란 어휘를 사용하며 사는 에벤키족이 있다. 그들이 전하는 곰 신화를 간단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어느 날 어떤 사냥꾼이 사냥하러 갔다가 암곰에게 잡혀 굴에서 동거를 하게 되었다. 몇 해를 그렇게 지내면서 둘 사이에는 자식이 생긴다. 그 후 사냥꾼은 암곰이 굴을 비운 사이 도망을 친다. 뒤늦게 알게 된 곰이 새끼를 안고 따라오자 사냥꾼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다. 화가 난 곰은 새끼를 두 쪽으로 찢어 한쪽을 사냥꾼에게 던진다. 남은 쪽은 곰으로, 던져진 쪽은 에벤키의 조상이 되었다.’
에벤키족 곰신화와 웅진 곰나루 전설을 비교해보면 그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다만 곰나루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면서 곰나루 주민과 곰은 친족관계가 아니라 서로 원한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당을 짓고 죽은 곰을 위로함으로써 화해하는 것으로 결말난다.
※참고 : 그들은 아직도 ‘아리랑․쓰리랑’이란 단어를 일상에서 사용한다. “아리랑은 ‘맞이하다, 영접하다, 받아들이다’와 ‘인내하다. 참고 받아들이다’--- 아리랑을 ‘맞아들이다, 영접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아리랑 고개’는 ‘임을 맞이하는 고개’가 된다. 아리랑을 ‘참고 받아들인다’로 해석하면 아리랑 고개는 ‘아리랑 고개는 임을 보내는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는, 즉 ’임과 이별하는 고개‘라는 의미가 된다.
경상도 지역에도 곰 신앙의 흔적이 보이나요? 영남 지역에는 단군신화계열의 곰 신화와 그 신앙의 흔적으로 보이는 곰 발바닥 암각화가 있다. 「봉화산의 암곰」이라는 전설에서 단군신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봉화산 꼭대기 커다란 소나무 아래 암곰이 살고 있었다. 암곰은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이어서 백일기도를 올려 예뿐 소녀가 된다. 이 웅녀는 사냥할 때 곰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길을 잃고 쓰러진 사냥꾼을 구해 준다. 웅녀의 강요로 둘은 동굴에서 동거한다. 일 년 후 웅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냥꾼은 처자식이 그리워 도망친다. 사실을 알게 된 소녀는 사냥꾼을 찾아 헤매다가 소나무 아래에서 목을 매 죽는다.”
이 이야기에는 단군신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암곰이 사람이 되고 싶어 백일기도를 올려 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퉁구스인들의 곰 신화에는 없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독특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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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암각화 탁본 부분, 오른쪽 중앙에 발자국이 그 아래쪽에 곰발바닥이 여러 개 보인다.
또 다른 영남지역 곰 신앙의 흔적으로는 옛 진한지역에서 발견되는 암각화를 들 수 있다. 경주 시내를 흐르는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지점인 예기소 북쪽에는 높은 절벽이 있다. 절벽 윗부분에는 선사시대 유적인 석장동 암각화가 있다.
그런데 석장동 암각화에는 곰 신앙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 발자국과 곰발자국이다. 제시된 탁본의 오른쪽 중앙 부분을 보면 사람 발자국이 있고 그 왼쪽 아래에 짐승 발자국이 여러 개 보인다. 곰 발자국이다. 이 곰 발자국은 단군왕검사회의 직계 후손인 진인(辰人)들이 경주지역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웅녀신앙을 유지한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석장리 암각화 말고 초기 신라인들이 곰을 신앙했다는 다른 증거가 있나요? 네 있어요. 신라인들, 특히 진한계통의 주민들이 곰을 신으로 모셨음을 보여주는 단서는『일본서기』에도 보인다. 일본 6대 천왕인 수인천왕 3년 「신라왕자 천일창」조를 보면, 천일창이 일본 천왕에게 가져간 예물 중에 “웅신리(熊神籬)”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웅신리는 곰을 신으로 모시는 휴대용 신전’같은 것이다.
한반도로 들어왔던 진인(辰人)들이 일본으로 이동해간 흔적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고마나리’가 백제의 ‘곰나루’에서 유래한 사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단군왕검 사회의 후예들이 곰 숭배 신앙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말한다.
신라인이 곰 신앙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작은 단서 하나가 역사를 새롭게 풀어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4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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