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배교수 음악산책(177)-베토벤 이상(理想)의 여인상을 그린 오페라 ‘피델리오’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4년 03월 03일
|  | | | ⓒ GBN 경북방송 | | 오페라 ‘피델리오’는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작품이다. 그는 이 오페라작품에서 여주인공 ‘레오노레’의 비길 때 없는 용기․진실․사랑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이상적인 여인상을 통해서 인간해방의 이념과 이상주의를 예술로 실천하였다.
베토벤은 역사상 음악을 ‘예술’이라고 주장한 첫 번째 음악가이다. 베토벤 이전에도 ‘바하’나 ‘모차르트’같은 많은 대작곡가들이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상전(上典)이나 교회․주문자(注文者)의 요청에 따라 우수한 제품(製品)을 제공하는 이른바 직업인이었다.
베토벤은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지를 가진 음악가였다. 자신의 음악이 사교장의 배경음악으로 취급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음악이 모든 예술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음악을 ‘예술’로 개혁하여, 서양음악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그를 악성(樂聖)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페라작품은 지나치게 상업성에 치우쳐서 대중오락으로 범람했으며, 예술이 갖는 숭고성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러한 형상을 베토벤은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극복하고 이상주의를 실천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1802년 안데아 빈 극장의 지배인 그라운 남작의 의뢰를 받고 한편의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는데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도중에서 작곡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무렵 빈의 2대 극장 경영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브라운 남작이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은 오페라 ‘레오노레’를 무대감독 전문가인 존라이트너(Joseph Sonnleitner,1765~1835)에게 의뢰해서 독일어로 번역을 하여 베토벤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오페라 ‘레오노레’는 1805년 11월 20일 작곡을 완성해서 안데아 빈 극장에서 초연 되었지만, 빈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한 상태여서 귀족들과 부호들은 교외로 피난을 나갔으며 관객의 대부분이 독일 말을 하지 못하는 프랑스 사병들이었기 때문에 공연은 하루만에 중지를 하고 말았다.
|  | | | ⓒ GBN 경북방송 | | 그해 4월 10일 베토벤은 배역을 교체해서 다시 공연을 했지만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 오페라 ‘레오노레’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대본을 찾는 도중에 극장측에서 ‘레오노레’를 다시 한 번 수정해서 공연을 해 줄 것을 요청 받고, 궁정 오페라 극장의 전속 시인 트라이치케(Georg Friedrich Treitschke)에게 의뢰해서 대본을 수정했으며, 곡명을 ‘피델리오’로 바꾸어서 직접 자신이 지휘를 해서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청각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보조지휘자인 궁정극장 전속지휘자 미하엘 움라우프의 도움으로 공연을 했는데, 연주자들은 작곡을 한 베토벤은 보지 않고, 지휘를 하는 움라우프만을 응시하면서 오페라는 진행되었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정적(政敵)에 체포되어 죽음을 앞두고 형장에서 고통받는 남편 프로레스탄 을 구출하기 위하여, 남장으로 변장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여인의 숭고한 애정의 힘이 마침내 남편을 구출하게 된다는 인간승리의 강인한 의지가 전편에 흐르고 있는 작품이다.
안종배<경주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경남대학교․일본 나고야예술대학 명예교수> 2014. 3. 3. ahnjbe@hanmail.net |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4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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