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진의 역사산책(12회)- - 장수발자국은 치우의 흔적인가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4년 03월 25일
오늘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나오셨나요? -네 오늘은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에겐 낯설지만 한 때 이 발자국은 신의 발자국으로 신앙의 대상이었어요. 바로 치우천왕과 관련된 종교문화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치우천왕의 발자국이다.
|  | | | ⓒ GBN 경북방송 | | 치우천황, 2002년 서울 월드컵 때 등장한 ‘붉은 악마’의 붉은 깃발에 등장했던 치우천황 말입니까?
네, 2002년 서울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응원 물결을 기억하실 겁니다. 참으로 대단했죠. 대한민국 국민이 하나의 깃발아래 그렇게 신명나게 어울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 때 표출되었던 한국인의 신명이 지금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류(韓流)는 한국인의 DNA에 잠복해 있던 아름다운 신명문화가 꽃피우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축구는 붉은 악마로 상징될 정도였다. 대한민국 축구를 공식적으로 응원하던 '붉은 악마'의 공식 깃발에는 도깨비형상화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응원단에서 채택한 그 문양은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조상 치우천황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치우천황은 중국 전설 시대의 인물 아닌가요? 네 맞아요.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 치우천황은 동이(東夷)계의 군왕으로 중국 황제에 대항하였다하여 후세에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숭앙받았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중국 진(秦), 한(漢) 때의 백성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산동성 동평군에 있는 치우릉(陵)에 제사를 지냈다. 이 때 붉은 기운(赤氣)이 반드시 뻗치므로 이를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사기』, 『한서』)
산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치우는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지금 북경의 서북쪽에 있는 탁록으로 쳐들어갔다. 그곳에서 황제와 탁록대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승기를 잡았으나 장기전에 휘말렸고 끝내는 지고 말았다. 당시 치우는 철두갑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래서 “동두철액(銅頭鐵額 : 구리머리에 무쇠이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비록 황제에게 패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군신으로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동방 무신(武神)의 원조다. 붉은 악마는 그러한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보고 그를 ‘한국 축구의 승리의 상징’으로 차용했던 것이다.
치우천황이 실제로 한민족의 조상인가요? 글쎄요. 앞에서 인용한 『한단고기』란 책에는 분명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책은 아직 위서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는 치우천황은 한민족의 주 혈맥이라기보다는 방맥(傍脈)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치우천황과 관련된 문화흔적이 한반도에 전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중 하나가 오늘 주제로 삼은 ‘장수 발자국’이다.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까? 네, 경주만 해도 두 곳에 발자국의 흔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북천과 남천이 만나는 석장리 암각화(동국대 앞 강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경주분지의 북쪽 산인 금강산 백률사 마당에 있습니다. 혹시 보셨나요.... 백률사는 불교공인 문제로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입니다. 경주 인근의 포항 칠포리 암각화에도 보이구요, 또 안동에 수곡리 암각화에도 발자국이 있습니다. 김해 초선대나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공림사 바위에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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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대 장수 발자국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를 하나 소개해 주시죠? 네 기회가 있으면 김해 초선대를 한 번 가보세요. 부산에서 낙동대교를 건너면서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금정산 고당봉이 보인다. 강을 건너면 오른 쪽이 신어산이다. 그 신어산에서 내려오는 강줄기와 시내 방향의 14번 국도가 만나는 초선대삼거리에서 남쪽으로 400여 미터를 가면 나지막한 봉우리가 하나 나온다. 가야국 초기에 담시선인이 노닐었다는 초선대(招仙臺)다. 『동국여지승람』은 가락국의 2대왕인 거등왕이 칠점산의 선인 담시를 이곳으로 초대하여 거문고와 바둑을 두며 서로 즐겼다고 적고 있다.
현재 초선대는 육지에 나지막하게 솟아오른 봉우리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거등왕과 담시선인이 노닐 때는 바다 속에 떠있는 일점 봉우리로 선경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시 김해평야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초선대의 돌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고대인들이 바위를 신성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종교적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초선대에 신성한 발자국이 새겨져 있나요? 네, 초선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뚝 솟은 대형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는 고려시대 제작된 아미타불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미타불 발 앞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대형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발의 길이는 자그마치 1미터 7센티미터, 폭은 55센티미터 정도 된다. 15여 년 전 초선대를 처음 답사했다. 그때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곳에 장수 발자국이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갔다. 그러나 30분 이상 조그만 동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나머지 돌아가려고 하는데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점퍼를 입고 바위무더기 입구의 반대쪽에서 올라왔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대뜸 “장수 발자국 바위”를 보러 왔는데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순간 나는 몸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장수 발자국에 대해 물었다. “바위에 선명하게 장수발자국이 있었어요. 내가 초등학교 그러니까 6 ․ 25가 막 끝났을 무렵 이곳에 소풍을 왔었어요. 그 때 기억이 오늘 아침에 문득 떠올라 40여 년 전의 그 장수발자국을 보러 왔는데 보이질 않네요.”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그 남자는 이야기보따리를 계속 풀어놓았다. “당시 내가 4~5학년이었는데 하도 신기해서 그 발자국 크기를 손으로 재어도 보고 누워 보기도 했어요.” 그 남자는 소풍을 다녀와서 할머니에게 장수발자국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옛날 장수 한 분이 여기 초선대에 한 발자국을 딛고, 송산에 한 발자국 딛고는 명지쪽으로 갔다”고 말씀하셨단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셨네요. 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특별한 행복을 느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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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
그렇다면 경주 금강산 백률사 마당에 있다는 발자국도 특별한 의미가 있겠네요? 네, 백률사가 창건된 배경부터 알아볼까요. 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이 왕과 상의하여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잘린 목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인 법흥왕 15년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라 했는데,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말로 그러한 이적이 일어났을 까요? 글쎄요? 하지만 그곳에 절을 세운 배경은 설명할 수 있다. 이차돈이 순교한 배경은 토착종교와 불교와 갈등 때문이었다. 정황상 백률사 터가 토착신앙의 성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곳에 있는 ‘발자국’은 불교 이전 토착신앙의 신앙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서는, 세간에서 말하기를 ‘백률사에 모셔진 관음보살이 언젠가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혹은 말하기를 ‘효소왕 때의 국선 부례랑이 지금의 원산 통천 지역으로 유람을 갔다가 말갈족에게 잡혔는데, 관음보살이 그를 구하여 돌아올 때 보였던 자취이다.’라고 전한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일연스님이 활동하던 13세기 후반에는 이미 ‘장수 발자국’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상징성이 사라지고 불교적 의미로 둔갑해 있었다는 것이다. 둘은 ‘장수 발자국’이 13세기 후반 이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인데요. 그렇다면 장수발자국은 언제 무엇 때문에 새겼을까요? 네, 세계문화사를 살펴보면 발자국은 기본적으로 신의 표식이다. 인도에 가면 부처님의 족상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이 신룡(神龍)의 발자국으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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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 화상석에 보이는 상림야합도
왜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바위에 발자국을 새겼을까요? 네, 그것은 한마디로 ‘애비 없는 자식’ 혹은 ‘애비 모르는 자식’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설명하는 신화적 사고가 반영된 상징물이다. 문화사적으로 보았을 때 장수발자국은 선사시대 ‘군혼잡교 문화’의 흔적이다.
『여씨춘추』에 보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임금이 없었다. 그 백성이 무리진 곳으로 몰려나와 어미가 있음은 알되 아비가 있음을 몰랐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말에 야합(野合)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군혼잡교문화와 관련해서 탄생한 말이다. 공자도 야합을 통해 낳은 인물이다.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들은 20세기까지도 집단성교의 풍습을 이어왔다.
|  | | | ⓒ GBN 경북방송 | | 치우족의 족휘[문장]
그렇더라도 우리나라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치우족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네,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치우를 동이족이라고 보고, 동이족이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견해를 수용할 경우이다. 둘은 치우족을 나타내는 족휘, 그러니까 치우부족의 부족을 나타내는 깃발을 보면 알 수 있다. 족휘의 아랫부분은 사람의 되퇴골을 그린 것으로 그 족휘가 나타내는 것은 ‘뇌택에 찍힌 신룡(神龍)의 발자국’이다. 발자국을 신룡의 흔적으로 보는 문화는 치우족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한반도에 보이는 바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치우족 후손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치우는 그의 어머니가 신룡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하여 탄생했다.
그러한 치우족의 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와 바위에 새겨졌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바람타고 흐른 고대문화의 비밀』, 2011, 소나무.)을 참고. |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  입력 : 2014년 0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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