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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진의 역사산책(30회)

1 서역인이 지키는 괘릉과 풍수지리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입력 : 2014년 10월 04일
ⓒ GBN 경북방송

오늘의 주제는?
네 오늘은 경주에 있는 왕릉인 괘릉의 무인상과 신라인의 풍수관이 중국인의 그것과 달랐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괘릉은 잘 아려져 있다. 불국사역에서 울산 방향으로 3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왼쪽에 있다. 경주를 다녀가신 분들은 한 번 쯤 들른 곳이다. 그 괘릉에 관해서 한 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괘릉! 네 서역인 무사가 지키는 그 릉 말인가요......
네 맞아요. 괘릉은 8세기 말, 통일신라의 전성기에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를 보여준다. 자생적인 묘제에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가미하여 이후 한국 능묘제도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인의 독창적인 창의력이 돋보이는 릉이기도 하다.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배치한 것은 신라인이 창안한 것이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은 동류의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봉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문인석과 무인석, 화표석(이곳이 왕릉이며 신이 걸어 다니는 길임을 알려준다.)이 잘 조성되어 있는데, 특히 무인상이 서역인의 복장을 하고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쩌면 당시 신라 조정에 봉사하던 서역인 호위무사였을 지도 모른다.
원성왕릉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후의 왕릉들이 이 원성왕릉의 배치도를 기본으로 하여 시대에 맞게 변형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원성왕릉을 지키는 무인상은 페르시아 무사를 표현한 것이 맞을까요?
당시 신라 조정에서 괘릉을 지키는 수호신(무인)으로 이국적인 서역인을 선택했다는 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페르시아인이 아니라고 해도 서역에서 온 아라비아상인을 호위하던 호위무사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먼 길을 다니는 상인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무술경호인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겠어요. 실제로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에는 서역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된다.

신라시대에 서역인들이 경주에 많이 살았다고요?
네 이제는 그러한 사실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경주 황성동 석실묘에서 출토된 토용(土俑, 통일신라-7세기), 그러니까 흙으로 만든 사람인형 중에 서역인의 모자를 쓴 심목고비한 인물(소그드인으로 추정)이 있어요.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에는 홀을 들고 서 있는 턱수염이 긴 서역인풍의 문관상도 있어요.

통일신라 시기에 서역인이 경주에 자주 왕래 했다는 사실은 최치원 선생이 남긴 시에서도 알 수 있어요. 최치원이 당시 국제상인이었던 소그드인의 춤을 묘사한 ‘속독’이라는 시가 있다. “헝클어진 머리 남빛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뜰에 와서 나는 새처럼 춤을 춘다.....”

처용도 서역인 아닌가요?
-맞습니다. “서울 밝은 달밤에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이지만 /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하고 있었다. 처용은 화를 내기보다는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대범함에 감동하여 약속하였다.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전염병)의 방문을 피했다.

처용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볼까요.
처용탈의 생김새는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다. 처용탈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소 험상궂으며 얼굴색은 한국 사람과는 다른 붉은색으로 정해져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처용탈이 붉고 이가 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처용탈의 피부색은 붉은색으로 줄곧 이어져오고 있다. 처용은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처용랑망해사편에 처용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왕이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귀경하려 할 때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동해 용왕의 조화 때문이니 용왕을 절을 지어주라’한다. 왕이 허락하자, 용왕의 일곱 아들이 춤을 춘다. 그 중 한 아들이 왕과 함께 귀경했고, 왕은 벼슬도 주고 이쁜 아내도 주었다.
이 때 등장하는 용왕의 아들은 바로 머리 해로를 타고 온 아라비아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당시 신라인과 아랍인의 교류를 반영한 이야기라 할 수 있군요.
신라와 페르시아가 교역했다는 책이 최근 발견되었다. 최근 발견된 ‘쿠쉬나메’는 ‘쿠쉬의 책’이란 의미이며 쿠쉬는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다. 이 서사시에는 7세기 중엽 멸망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유민들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지도자인 아비틴이 바닷길로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와서 정착했다는 이야기다. 11세기에 이란 지역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너무 멀리 왔네요. 괘릉과 관련해서 신라인의 풍수관을 이야기 해 주신다면서요?
오늘 주제로 삼은 원성왕릉은 일반적으로 괘릉이라고 한다. 왜 괘릉이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 괘릉이란 이름이 만들어진 연유를 보면 신라만의 장묘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능이 조성된 곳은 원래 물이 고여 있던 늪지였다. 무덤방을 조성한 후 물이 차오르자 관을 돌 위에 걸쳐놓고 흙을 쌓았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붙여 ‘괘릉’이라 하였다.

널을 땅위에 걸었다고요? 정말일까요.
물론 발굴해 보아야 진실을 알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괘릉 터에는 원래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동곡사). 왕릉은 명당 중의 명당일 텐데, 굳이 물이 고이는 늪지에 왕릉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식 풍수관념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무덤에 대한 사고방식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 아래로 수맥이 흐르는 것도 나쁘다고 하는 데, 물이 찬다는 것을 무덤으로 쓸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그러한 땅에 일반인의 무덤도 아닌 왕릉을 썼다는 것은 신라문화의 기원이 중국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네요.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풍수관하고는 확연히 다르네요.
네, 신라인들은 중국인과 다른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신라의 풍류도가 바로 우리 고유의 생명관과 생사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무속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巫)의식 속에 남아 있기도 해요. 무속인들이 산에가 기도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나요?

네...
그들은 늘 산중에 있는 바위틈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지요. 왜 그렇게 할까요? 그들은 바위틈을 땅 여신의 자궁으로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죠.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구요. 그곳을 통해 저승에 있는 신들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소원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죽으면 황천(黃泉)으로 가죠. 땅 속에 있는 생명의 샘으로 간다는 의미지요.

땅 여신의 자궁이기도 한 바위틈에 대고 조상들은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기도하고, 풍요를 기원하기도 했어요.

우리나라 풍수와 중국 풍수는 다른가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풍수사상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전통적인 지리 관념이 있었다. 어떤 부족이 이동하여 터를 정할 때 경제적 군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을 선택한다든지, 공동체 주변의 특정한 지역(‘蘇塗’)을 신성시한다든지 했던 것에도 자생적 지리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 고유의 지리관념은 중국의 풍수사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령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예로 들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경주의 진산(鎭山)은 경주 분지의 중앙에 있는 나지막한 산인 낭산이다. 하지만 신라의 왕성(반월성)은 그 산을 의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성인 반월성도 남천의 물이 쳐들어오는 형국(水波형국)이다. 후대의 중국 풍수관점으로 보면 길지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도 아니고,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네요. 신라인의 독특한 풍수관을 읽을 수 있는 예가 더 있나요?
잘 아시다시피 석탈해는 꾀를 써서 반월성을 빼앗지요. 그가 반월성을 탐낸 것은 그 형세가 ‘삼일월’을 닮았기 때문이었어요. 초승달 형세란 말이죠. 초승달은 앞으로 성장할 기운을 담고 있잖아요.

또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처음 왕성으로 삼았던 창림사지 터도 중국 풍수관으로 보면 나쁜 터죠. 서북풍이 불어오는 곳이니까요.

괘릉과 괘를 같이하는 터로 석굴암을 들 수 있어요. 다 아시다 시피 석굴암 본존불 아래로 샘물이 흐르고 있어요.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셈이지요.

오늘날도 만연하고 있는 풍수관에 대해서 마무리 말씀 해주신다면?
중국의 풍수사상을 받아들인 선조들은 명당에 무덤을 마련해야 본인은 물론 후손이 발복한다고 생각했고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새로 탄생한 대통령의 생가와 그 조상의 무덤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터를 보기 위해서다. 과연 그러한 생각이 옳을까요?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생각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는 특별한 소수가 창안한 생각들을 마치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믿는 경향이 있다. 풍수사상만 해도 그렇다. 동서양의 문명사를 보면 풍수사상을 맹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풍수사상을 신봉하지 않는 서양이 물질적 풍요를 이룬 것만 보아도 그렇다. 여러 사상을 존중하되 그 사상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들에 왕릉을 세운 신라인들도 세계에서 보기 드문 1000년 왕조를 이끌지 않았는가?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입력 : 2014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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