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희식 선생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국가보훈처 선정 3월의 독립운동가로 재조명 받게...
김광희 기자 / 입력 : 2010년 03월 02일
 |  | | | | ⓒ 경북방송 | | 1919년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가 9년 넘게 옥고를 치른 차희식 선생이 국가보훈처 선정 3월의 독립운동가로 재조명 받게 되었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성장하였다. 장안면은 동리마다 서당이 있어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육과 문화의 수준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일찍이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성장한 선생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여러 사람을 인솔하는 자질이 뛰어났고, 3·1운동 당시에는 장년층으로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통솔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고, 간척공사를 비롯해 송충이 잡는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등 노동 착취가 심하였다. 일제의 수탈정책은 다른 지역보다 소작농의 비율이 높고 여건이 열악한 이 지역민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으로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점점 높아가는 때에 서울의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지역의 지도자들은 구장회의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구체화했다. 선생은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인근 주민들에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우정면 주곡리와 석포리 주민들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위 과정에서 일본 순사가 쏜 총에 주민이 피살되자 선생을 비롯한 군중들은 격분하여 도망가는 일본 순사 가와바다를 추격하여 처단했으며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시위 후 일제는 장안면, 우정읍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선생을 비롯한 204명을 시위 주모 혐의로 검거하였다. 선생은 소요 등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언도 받았고 9년 2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6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광희 기자 /  입력 : 2010년 03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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