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향 철학의 심리적 배경 연구 - 김춘희 회장(경북새살림봉사회 회장)
여성 군자 장계향을 통한 경북의 정신문화 알기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 입력 : 2010년 08월 23일
-아래 논문은 지난 7월 29일 중국 심천에서 열린 '韓中 경제문화와 사회발전포럼'의 주제 발표 논문 중의 한 편이며 논문집에 게재된 내용이다. 중국 심천에서, 주중한국대사 및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韓中 경제문화와 사회발전포럼'은 한중여협 부설 한중문화교류연구소와 한국세계지역학회, 북경대학 중한역사문화연구소가 주최하고 중국심천한국인회가 주관했으며 경상북도와 재중국 한국인회가 후원했다.-
|  | | | ↑↑ 경상북도 도지사 부인 김춘희 여사 | | ⓒ GBN 경북방송 | |
김 춘희 회장(경북새살림봉사회 회장-경상북도 도지사 부인)
1. 장계향은 누구이며 자란 환경( 물리적, 시대적, 교육적 ) 은 어떠했나?
어린 소녀 시인 張桂香( 1598~1680)은 노량해전을 대미로 7년간의 대 전쟁, 임진왜란이 막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아버지 敬堂 張興孝(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안동시 서후면 黔堤里 春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鶴峰 金誠一의 문하생으로 당대학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로 영민하고 천재성을 지닌 어린 소녀는 사랑방의 분위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성현의 좋은 격언이나 역사나 일화 같은 아버지의 말씀들을 총명으로 익히고 수고로움 없이도 소상하게 알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긴 하지만 문화적으로 후진국이었던 일본군은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으며 너무도 많은 백성들이 살상되고 전쟁이 할퀸 자국이 곳곳에 남아있는, 민생이 피폐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장계향은 아버지 경당 주변에 모여든 많은 선비와 학당들의 일상 대화내용속의 나라걱정과 사회적 참혹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小學 』『十九四略』등도 어렵지 않게 학문의 뜻을 통했으며 12~13세가 되어서는 『鶴髮詩』『敬身吟』『蕭蕭吟』과 같은 주옥같은 詩들을 지었다, 글씨도 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赤壁賦體』는 당대 서예가 청풍자 鄭允穆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 아버지 경당은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시던 鶴峰 金誠一에게서 수학하시다가 스승이 임진왜란 전투로 돌아가시고 西厓 柳成龍이 하회로 돌아오시게 되자 거기에 나아가 1607년 운명 하실 때까지 절절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1608년 (선조41) 寒岡 鄭逑선생이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한강선생의 문을 두드렸다. 임천에 숨어 ‘敬’자를 써 붙이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독서하고 사색 궁구했다, 그리하여 경당은 후기 영남학파라고 부르는 退溪의 학문을 서애, 학봉, 한강으로 이어내려 세 분의 스승에게 한국 성리학의 가장 요긴한 사상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선비이기도 하다. 천재성을 가진 그의 외딸인 어린 소녀에게 아버지는 全人으로 보였고 성인의 모습 전부여서 아버지 어머니 말씀은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실천하며 타고난 총명을 깨쳐 갔다, 십여 세 전후에는 제자를 뛰어 넘어 동양철학의 우주변천이론인 元會運世의 數卦도 꿰뚫어 알았다. 또 청담법사가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을 무아지경에 이끌어가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고한 『蕭蕭吟』, 孝의 근본이 자신의 몸을 다스린다는『敬身吟』,성리철학으로 완성된 인간의 모습, 바로 성인됨으로 나아가기 위해 『聖人吟』으로 자연과 세상을 노래한 장계향은 체계적인 교육 없이 이루어졌다고 『행실기』에 쓰여있다, 임란후의 나라사정은 전체 국민의 3할 가량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젊은 층의 급격한 감소로 농사지을 사람도, 군대에 보낼 사람도 없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은 어린이 노인 여자나 상이용사뿐. 오랜 전쟁으로 경작면적이 격감하고 황무지가 증가, 관료들은 월급도 못 받은 지 오래되었다, 이런 사정인데도 토지세를 징수하고 軍政강행으로 도적 떼가 성행, 거지 떼 출몰로 사회는 극도로 어수선하며 민심은 갈라졌다. 양민으로 구성되던 군대를 장정부족으로 천민으로 대체되고 양반의 생명과 재산을 천민이 지켜야 하는 모순, 곡식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천민자본주의가 성행하는 사회. 그러면서 지식계급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유생들의 관념적인 태도와 성리학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현실을 외면한 공리공담의 유행, 결국은 많이 배운 것이 세상을 해롭게 하는 세태가 임란후의 사회상이었다. 바로그때 경당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소리 없이 돌아온 서애와 만나면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배우게 된다. 柳成龍은 17세 때 부친의 임지인 의주에서 압록강을 거닐다가 심홍원이 버리고 간 짐바리에서 <陽明集>을 발견하면서 조선에서 가장먼저 양명학을 접하게 된 사람이다, 류성룡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로 자처하지만 교조적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가졌다. 성리학 이외 다른 학문이 모두 이단으로 몰리던 닫힌 시대의 열린 사고였다. 장계향은 유소녀기의 감수성으로 아버지를 통한 서애 선생의 영향을 고스란히 입었음은 여지가 없다.
2. 鶴髮詩 3章
또한 그 시기에 지었다는 『鶴髮詩 3章』은 단순한 재주가 아닌 인류애를 갈망하는 높은 인간정신이 깃든, 요즘 말로 나타내면 <민중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시를 쓴 동기로 ‘며느리가 수심에 잠기어 시어머니 모시면서 만 리 먼 변방에 군역 나간 아들과 남편은 소식도 없다. 그 팔십이 넘은 시어머니, 숨이 끊어졌다 이어지며 깜빡 깜빡이며 어느 때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애절한 늙으신 시어머니의 소문을 듣고 보고는 나도 함께 슬퍼하면서’ (姑之夫行役 其八十之母絶而復생 幾至滅性 余聞而哀之 因作此詩)라 했다.
鶴髮臥病인데 行子萬里로다 백발의 늙은 몸에 병은 깊어 가는데 아들은 멀리 있구나 行子萬里인데 曷月歸矣일꼬 아들은 멀리 있는데 어느 달에나 돌아올꼬. 鶴髮抱病이요 西山日迫 이로다 백발의 늙은 몸에 병은 깊어 가는데 서산 해는 붉게 타며 저물어 가는구나! 祝手于川이나 天下漠漠이로다 하늘에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어 봐도 저 하늘은 막막하기만 하구나! 鶴髮扶病이요 或起或배라 백발늙은이가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보건만 일어섰다가 今尙如斯이거늘 絶裾何若일꼬 쓰러지는구나.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은데 절거하면 어찌 할꼬. ※絶裾: 東晋(서기300년경)시대 溫嶠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먼길을 떠나는데 아들 옷자락을 잡고 ‘가지마라’ 하니 아들 옷자락 을 자르고 병영 땅으로 떠났다는 고사 17세기 병역제도는 양반도 천민도 군대에 안 간다. 양민들 중에서만 군대에 가기 때문에 늙은 시어머니와 젊은 며느리만 남긴 체 멀리 떠난 아들은 소식도 없다. 하나 뿐인 아들을 기다림에 지친 처절한 이웃노인이 시의 주인공이다. 양반의 자제는 군대에 가지 않는다. 국방의 의무는 양민에게만 있다. 외아들밖에 없는 늙은이, 자식도 없이 젊은 아내를 두고 간 남편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한창 자신만의 즐거움과 자랑 속에서 자라날 어린 소녀의 가슴에 이웃의 딱한 사정이 눈에 들어오고 슬픔과 안타까움과 더불어 왜 이런 불합리한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는 백성에게 폭력이 되고 무관심이 되고 신분제도 또한 폭력이며 구조적인 가난은 대대로 지옥 같고 또 여자라는 신분도 굴레가 된다. 그런 것들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참혹한 현실을 곰곰 생각하며 궁구하기 시작했다.
3. 장계향의 의식의 성장 배경
성리학은 중국 宋(특히 북송)나라의 시대적, 정치적, 지역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롭게 나타난 정치철학이다. ‘어질고 치우침이 없다’는 유학의 仁을 근본이념으로 모든 관계성에서 平等을 지향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은 어느 한쪽으로 끊임없이 치우치려하지만 그 욕망을 다스려 인자함에 도달함으로 君子가 되고 성인에 이르는 것을 성리학의 근본철학으로 삼는다, 仁을 추구(修身)하고 그것을 실천(愛民)하는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보았다. 조선 중엽, 17세기는 성리학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修身의 완성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보살펴 주는 것( 愛民)을 근간으로 삼는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중종37(1542) 풍기 군수 주세붕은 경상도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安珦을 제향했다, 이렇게 시작된 백운동서원은 명종5년(1550) 이황의 건의로 조선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면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파가 조선의 知性系를 장악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성리학의 후기 영남학파로는 퇴계를 宗祖로 삼아 西厓, 鶴峰, 寒岡으로 내려와서 경당 장흥효에 이르고 장계향의 아들 存齋와 葛庵으로 내려와서 갈암의 아들 密庵 李栽로, 또 장계향의 외현손인 大山 이상정 . 小山 이광정으로 내려가면서 150년의 역사를 이끄는데 그 가운데 장계향의 역할은 세대를 거슬러 내려가며 영남 사림학파의 근간이 된다 하겠다. 어릴 때부터 시대정신을 깨치고 성리학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장계향은 꼿꼿한 선비인 아버지를 통해서 삶의 理想을 설정하고 성리학의 근본철학이 진리임을 깨닫고 修身과 愛民은 옳은 것으로 확신하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 修身을 가르치는 학교가 가정, 사회이며 修身은 愛民을 통해서 완성된다.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닦아 가족, 이웃, 사회와 국가에 헌신하는 삶을 살자 -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최초의 스승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사회적 재앙이 된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올곧은 스승이 필요하고, 배운 것은 나누는데 기쁨이 있다. 많이 배우는 것도 좋으나 바르게 실천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 등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하여 西厓 선생의 사상과 학덕을 전해 듣고 몸으로 마음으로 두 분을 받아들인다, 열 두어 살의 소녀는 『聖人吟』에서보면 그때 이미 君子의 조건을 터득하고 있었다, ‘不生聖人時하니 不生聖人面하고 聖人言可聞이니 聖人心可見이로다’ 성인의 때에 태어나지 못해서 성인의 모습을 뵙지 못했으나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 성인의 마음 쓰심을 넉넉히 알리. “누구든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성인이 범인보다 특별하다면 범인이 따라 갈 수 없겠지만 성인의 용모, 언어는 범인과 다르지 않으며 성인의 행동도 인륜을 따른 것이므로 성인을 따라 배우지 않는 것을 근심해야지” 매일 해야 하는 여성의 가정사란 어떻게 보면 하잘것없고 시시하고 賤하기까지 한 日常 事에 지극한 의미를 불어넣고 그것으로 성인이 되고자한 것은 하늘이 알려주지 않으면 가능 하겠는가? 修身으로 愛民을 하는 것, 가정 사를 통해서 성인이 되겠다는 다부진 마음을 먹은 이 어린 소녀는 열린 시각으로 주위의 어려움이 생기면 왜 그럴까를 깊이깊이 살피게 된다. 논어에서 말하는 君子의 조건 1) 君子道者 三哉無能焉 군자의 도는 세 가지가 있는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仁者不憂 어질어서 근심하지 말아야 하고 知者不惑 지혜로워서 유혹받지 말아야 하고 勇者不懼 용감해서 두려워 말아야 한다. 2) 君子는 周而不比하고 小人은 比而不周이로다 군자는 두루 펼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소인은 한쪽으로 치우친다, 3) 君子懷德 군자는 덕을 생각한다, 4) 君子 喩於義 군자는 의리를 소중하게 여긴다,
이런 군자의 덕을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사를 통해서 닦으려고 마음을 먹은 장계향은 시집가기 두해 전 열일곱 나이에 몸종 몇 사람과 함께 어머니 병환을 구료하며 손님접대와 많은 문인의 시중 아버지 뫼시는 일을 도맡아 감당하여 나갔다, 시집갈 나이가 가까워지니 장규수는 스스로 생각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를 ‘시 짓고 또 글씨 쓰는 일은 여자로 꼭해야 할 일은 아니 옵니다’ 하고는 더 이상 좋은 문장과 묘한 필적과 솜씨는 남겨지지 않아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혼인 후, 군자 철학을 생활속에서 녹여낸 일상
장계향은 19세에 아버지 경당의 문하에 있던, 영해의 나랏골의 재령 李씨 石溪 李時明과 혼인하게 된다. 그 때 석계는 광산 김씨 近始齋 金垓의 사위가 되었고 두 해전에 아내를 잃고 일남일녀를 키우고 있던 홀아비였던 이시명이였고 그의 재취가 된 것이다, 아무리 그 시절 양반집에서는 三娶까지도 할 수 있었다지만 잘 자란 규수가 재취로 간다는 것은 좋은 혼처자리는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혼인해야 할 시가 쪽 가족관계로 보아서도 선택하기 어려운 조건이 많았다. 혼인을 결정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없어서? * 이시명을 흠모했기 때문에? * 더 근본적인 생각, 君子論的 입장에서 마음을 정했을까? ◆ 이시명의 혼인 당시의 가족상황 부모님2, 큰형님의 유자녀 (아들2 딸3), 중씨의 빈소, 형수(병을 앓고 있었음) 딸1, 이 시명 본처소생1남1녀, 혼인하여 살림나지 않은 동생내외, 미성동생1, 이시명, 집 안 밖의 시종들, 사랑채손님들, 일가척당들, 모두 합해서 약 30~40명 정도 , 집은 마흔 칸 단순히 어른이 권한다고 했을 리도 없고, 이시명을 흠모하기도 했고 , 그리고 君子的 입장에서 <시댁은 수신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고 이웃은 애민을 깨닫게 하는 학교 같은 것> 이란 생각에서였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광산 김씨 소생 尙逸을 5년간 5리가 떨어진 남경훈이란 선비 집으로 업고 다니면서 仁을 실천하며 자신의 아들 딸 합해서 7남3녀를 키워내며 매일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修身愛民 사상을 풀어내었다,< 聖人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을 평생 동안 그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를 생활속에 녹여내면서 장계향은 한 時代精神의 가정적 實現을 위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지 않은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임을 깊이 느끼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임란이 끝나는 해에 태어났지만 고스란히 그 폐해를 겪으며 자란 유소녀 시절의 장계향은 혼인(1616) 후에도 1627년의 정유재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의 참혹상으로 인한 문치주의의 모순에 더할 수 없는 아픔을 겪게 되고 장계향은 또다시 시대정신으로는 풀 수 없는 여러 사회상과 맞닥드리면서 고민하고 궁구하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간다.
5.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 양명학으로
시대환경에 따라 일정한 조건을 만나면 변화하는 성리철학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아픔이었다. 성인됨을 이상으로 품고 군자 됨을 지향하는 사회는 반드시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天經之義로는 시대의 요구를 풀어낼 수 없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士 農 工 商의 계급은 하늘이 정한 것이어서 사람이 바꿀 수 없기에 사대부(양반 귀족)의 자녀들은 대대로 사대부가 되며 나라를 지킬 군대가 없어도 ‘ 나 몰라라’ 하는 세상이며 천민의 자식은 평생 한번 허리 펴고 살지 못하는 모순투성이 세상 아니던가. 입으로만 성리철학의 平等을 부르짖던 사대부의 이중적인 행동은 장계향으로 하여금 절망과 아픔을 느끼게 한다. 장계향의 눈에 비친 이시대의 사대부 남자들의 모순에 통절을 느끼지만 그들이 다 아버지며 아들들이며 남편이지 않은가. 그럴 때마다 몸소 행동으로 알뜰히 알뜰히도 쉬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말하고 자신을 다스리며 이웃에게 가르쳤다. 셋째 아드님 葛菴 李玄逸이 쓴 『행실기』에서 “ 曰 善者人之所欲也라 今夫三尺童子指而言이어늘 曰 汝善則喜면 汝不善則怒라 善之當爲는 人心之所同然也니라“ “착하게 되려는 것은 사람이 바라는 것이다. 지금 삼척동자를 보고 ‘너는 착한 어린이야!”하면 기뻐하고 ’너는 착하지 못하고 나쁜 어린이야“하면 화를 낼 것이 아니냐? 그런즉 착한 일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고 또 사람은 모두 착한 마음을 타고 났으며, 모두 착하게 되려고 애쓰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니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속 깊이 숨겨진 착한 마음은 같은 것이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또 『행실기』에서 “又 曰 吾嘗病世間人은 以物而害義라 義爲重이요 物爲輕이거늘 豈可舍重而取輕乎이랴” “내가 늘 세상 사람을 안타까이 여기는 일은 물질이 있다 해서 그것을 바르게 쓰지 못하고 의리를 해쳐서 서로가 멀어지는 일이구나! 의리는 무거운 것이고 물질은 가벼운 것이거늘 어찌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갖고자 하는가?” 성리학의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자는 용납할 수 없었고 天經之義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三族이 滅禍를 당하는, 성리학적 폐쇄이념이 주도하던 시대에 열린 사고로 학문의 다양성과 장점을 수용하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한 서애 선생께서 주장하신 작미법( 빈민구제 정신으로), 속오군(천민 노비의 인간적인 대우) 노비등용문제등에 깔린 精神을 장계향은 받아들인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련이 있으며 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진리를 생활속에서 풀어내기 위하여 논어의 知을 다시 생각한다,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 일지라도 不如樂之者 니라’ ’아는 것은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이것을 더 심화시키면 ‘혼자서 아는 것은 세상의 관계를 통해 아는 것만 못하고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은 나누고 보살핌만 못하다는 것’. 일진대 ........‘모든 것은 평등하다고 했는데.......’ ‘세상은 이웃과 함께 이루어야 하는데....... ........ ’어려운 시절일수록 올곳은 스승이 필요하며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데........‘
성리학적 폐쇄이념이 주도하던 시대에 열린 사고로 학문의 다양성과 장점을 수용하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간 서애의 철학이 아버지를 통해 받아들인 장계향에게는 현실을 해결해가는 진리로 받아들여 말없이 시대를 구하는 철학으로 키워간다,
6. 孝는 하늘이 낸 것이고 法은 사람이 만들었으니.... 시집온 지 7년째(1622) 아버지 경당 회갑 년에 어머니 안동 권씨가 별세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늘 걱정이던 병약하신 모친이 돌아가시자 홀로 남은 아버지 모시는 일과 어머니 빈소예절이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슬하에 아무도 없으니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실까 극진한 효성은 언제나 친정부모가 마음에 쓰였다. 天性과 人倫으로 볼 때 하늘의 것이 우선이지 않는가. 孝는 어버이섬기는 정성에 의하여 하늘의 도리를 밝히는 것이며 모든 善의 근본이지 않는가. 孝의 가치관과 出家外人이며 三從之道의 예법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한해에 한번씩 200리 먼 길을 친정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안부를 전했는데.... 부모를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 至誠이면 感天이라고 하지 않는가. 너무나 지극해서 하늘이 감복했다. 시아버지와 남편과 의논한 끝에 허락을 얻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외가의 먼 친척인 權夢一이란 분의 따님을 새어머니로 모셨다, 그리하여 아버지 경당이 마음 놓고 학문연구에 전념케 해 드렸다. 새어머니께서 살림에 마음이 붙도록 2년 이상 모시면서 새로운 친정동생을 출산, 산바라지까지 한 연후에 3년 만에 시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 경당은 재혼한 지 10년 만에 1633년 별세함으로 친정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큰 동생은 겨우 8세라 시어른과 의논한 후 시집으로 데리고 와서 기르고 석계로 하여금 수학케 한다, 다시 친정 식구들을 시댁 부근으로 이사시켜 돌보아주고 친정조부와 친정부친의 신주를 모시고 와서 봄, 가을 향사를 지낸다. 그리하여 3남1녀 인 동생들을 새어머니와 같이 이웃에 집을 마련해 주고는 아우들을 혼사시킴에 모두 시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出家外人이란 예법과의 충돌도 뛰어 넘어 끊어질 뻔 했던 안동 장씨 일문의 후손이 오늘에 이어지게 하였고 지금 장경당 후손들이 전국에 수 백 명이 있으니 모두가 근 400년 전의 장계향의 높은 덕이 이렇게 남아있음이다. 갈암은 『행실기』에서 ’이것은 모두 우리 아버지의 너그러움이라 하나, 그것 보다 어머니 장부인의 지극한 지성에 감복하여 아버지께서 따랐던 것’ 이라 적고 있다, 무남독녀 외딸을 시집보내어도 어버이의 가르침을 훌륭히 계승하여 그 아들이 할 일도 다 한 것이다.
7. 석보에서 首比로 석보에서 수비로 이사를 하시다.(1652) 친정아버지, 시아버지도 돌아가시고(1633) 병자호란(1637)이 일어나면서 남편 석계 이시명 선생은 임금이 청나라임금에게 항복한 수모를 국민의 수모로 받아서 바깥의 출세를 포기하고 임천에 숨어서 책 읽고 詩 지으며 세상의 영광을 포기한 생활을 택한 선비(崇禎處士)로써 망해버린 명나라의 연호를 지키는 삶을 선택하고 석보에서 수비로 이사를 온다. 모든 재산은 조카에게 주고 빈 몸으로 首比山으로 이사를 와서 띠풀로 지붕을 인 청빈한 삶 속에서 자식과 더불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양식을 삼으며 자녀교육의 근본을 內外사랑에 두고 지성인의 모범을 보이며 자식들을 교화한다. 산속으로 들어가서 首比 (首의 뜻풀이: 천하에 모범을 세운다. 比의뜻풀이: 子曰 君子는 周而不比하고 소인은 比而不周하니라 에서 <차별하지 않음으로 모범을 보인다는 뜻>) 라는 지명을 붙이고 생활하면서 논어에 나오는 子曰 苟志於仁矣면 無惡也니라 -참으로 어진 것에 뜻을 둔다면 마음에 악이란 생겨나지 않는다.- 는 철학을 궁구하면서 실천하는 삶을 살다 20년(1653~1672) 가까운 세월동안 首比山에서의 생활은 그의 『행실기』에는 나와 있지 않다. (심화연구를 통해서 얻은 내용으로 보면) 그때 거기서 여러 자식들이 세상을 위해 살도록 어머니의 진정성을 가지고 소리 없는 소리로 자식을 키우는 시기였으리라 본다. 어질지 못해서 오는 惡이란 모자람의 원인이 되어 불만을 낳고 무리한 일로 모순이 생겨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이고 그 모자람을 남이나 이웃이나 국가 사회 세상의 탓으로 돌리는 것임을 깨닫다. 시대에 대한 불만을 이기지 못해 남편은 더러 화가 난 기색을 밖으로 들어낼 때가 있어도장부인은 和한 얼굴로 노여움을 풀어드리고 자신이나 남편에게 허물이 있다 해도 잘못에 이르지 않도록 남편과 함께 인내와 수양으로 이겨 나갔다, “당신께서 벼슬을 버리시고 집안에 계시게 되었으니 마땅히 詩와 禮節을 자식과 이웃과 손자에게 가르치고 인도하심이 당신께서 하실 일이옵니다. 세월이 흘러 버리기 전에 젊은이나 어린이를 삼가 거느리시고 학문을 말씀하시고 예절을 가르치는 것으로써 앞날에 큰 빛이 되게 하여 후인의 앞길을 열어 주시는 일을 과업으로 하심이 마땅하리라 보겠습니다.” 아내의 간곡한 말을 기쁘게 듣고는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초하루 보름에는 小學과 性理學을 가르치며 애국과 지사와 열사와 의사의 길을 가르쳤으며 鄕射儀式과 士相見禮 (고을의 어진 선비를 선발하기 위하여 활쏘기와 투호등의 의식을 행할 때 선비가 서로 만나 행하는 예절)의 모습도 가르쳤다. 귀한 손님을 모시듯 남편을 대하며 숭정처사로서의 절의를 지키며 세상의 출세와 영달을 포기한 남편의 친한 벗으로 도움을 주면서 사랑받는 아내의 길을 다했다. 이곳에서 장부인은 자손과 후대에게 남긴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146종류의 음식들을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손수 요리를 담당하는 부녀가 자신의 경험과 실증으로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고 이렇게 쓰여진 이 책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란 점이 특징이다. 큰 어머니 됨의 가장 기본 되는 의무와 사랑은 음식으로 자식을 키워가는 것임을 알려 준다, 8. 곳간을 풀고 도토리 죽으로 이웃을 .....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은 패전 보고가 이를 때마다 파천을 떠올리고 .......여차하면 요동으로 도망갈 생각만 했다,’ 고 <유성룡 > 책에서 이덕일은 쓰고 있다, 임금조차도 전쟁이 터지면 혼자서 도망 갈 궁리만 하고, 충효를 부르짖던 사대부들은 백성이 굶어 죽어간다 해도 무관심이다.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는 판국에 경상도 영양 작은 마을에 가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소문이 나라 안팎으로 자자하다. 기근이 들거나 흉년이면 골목마다 자식들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려서 장부인 집으로 멀리서 찾아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큰 가마솥에다 갈아놓은 도토리가루에 쌀 조금 넣어 죽을 끓여서 오는 행려자, 거지 떼, 피난민에게 먹이고 돌아 갈 때는 줌치(한 홉 정도의 쌀을 담은 주머니) 주머니를 주며 ‘많이 줄 수 없어 미안 합니다’ 그저 허리를 조아리는 장부인. 석계선생은 6000석 정도의 영남지방에서 열 번째 안에 드는 부자였다고 한다. 석계부친인 雲嶽 李涵선생도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여 명성이 알려진 분으로 임란이 터지자 나라가 어려워지고 게다가 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모친 喪 中이었지만 편하게 있을 수 없어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일에 가산을 내 놓고 창고를 풀어 도토리를 섞어 죽을 끓여 수백 명을 살렸다. 이런 집안내력으로 시집을 간 장계향은 세상에 형제 없는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 홀아비, 과부가 되어서 찾아갈 곳 없는 이. 늙어서도 자식이나 형제 척당이 없는 이가 있음을 알게 되면 물건을 보내주고 도와주는 일이 대소가의 일이나 다르지 않으니, 근친이 이것을 알고 장계향의 후덕함을 탓하며 지나치면 넉넉지도 못한 살림을 축내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부인이 전해 듣고는 “내어찌 내 살림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저 지경 어렵게 된 분이 저렇게 참고 견디어 가는 것은 마음이 어진 것이니, 내 뜻을 알아 곧 일어설 수 있으려니, 일어서게 되는 날 나도 더 넉넉해 질 것이다,”고 했다. 사랑과 너그러움이 일가 척당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흉년, 전염병, 전쟁은 많은 이웃을 잃게 만든다. 창궐하는 전염병, 대수롭지 않은 병도 걸리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장계향은 혼자서 의술을 익혀 아픈 이에게는 병을 고쳐주고 없는 이에게는 나누어 주고 베품으로 일관한 인생이었다. 17세기의 여성은 일반적으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이상이었고 현모양처가 된다는 것은 가정 안에서 남편 자식에게만 잘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장여인은 그것을 넘어서는 헌신으로 세상의 어려움을 껴 앉는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세상이 어려우면 나도 어렵다는 정신으로 주류적인 삶에서 벗어난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기근이 들고 흉년이 오면 그것에 대비해서 노비들에게 뒷산 도토리를 수십 섬씩 모아 두었다가 요긴히 사용했으며 몸소 뒷산에 도토리나무를 많이 심어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영양, 두들마을 뒷산에은 도토리나무가 울창하다.( 재령이씨 종손의 증언) 9. 자손과 더불어 기쁨을 노래함
장여인이 73세 되던 해 자손과 함께 기쁨을 노래한다. 人生古來七什稀 인생에서 70을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 했는데 七十加三稀又稀 70에 세살이 더했으니 드문 가운데 드믄 일. 稀又稀中多男子 드문 가운데 아들 많으니 더욱 드문 일 稀又稀中稀又稀 드문 가운데 드문 일이 겹쳐 드문 경사가 있구나
부친의 생애를 지켜보면서 유소녀 시절부터 꿈꾸어온 修身과 愛民,을 구체적인 생활속에서 녹여내고, 막혀 있던 평등사상을 또 다시 열고 뛰어넘어서 세상에 펼친 용기있는 여성이며 남성 사회 내에서 진정한 여성군자의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준 여성군자 장계향은 仁을 생활속에서 완성시키고 愛民으로 세상을 껴 앉고 이웃을 행복하게 했던 자랑스런 경북이 낳은어머니이다. 修身과 愛民을 생활속에서 풀어내고 日常事를 통해 성인의 경지까지 끌어 올린 큰 어머니는 이재 자식들과 더불어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면서 잘 살았다는 족한 감정에 젖어 기쁨을 노래한다.
맺음말
일상의 모든 행위의 근저를 성리학적 이념에서 찾아서 살아온 장계향이다. 자연의 원리를 체득하여 완성된 인격에 도달한다고 하는 근본정신에 있어서는 모든 이에게 길을 열어둔 보편적인 철학사상이 性理學이었지만 여성들에게까지 그 실천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인륜의 날마다 늘 하는 일을 잘 수행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 즉 딸로서, 며느리로서, 적처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곧 바로 성리학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일임을 확신하고는 일생을 통해 매진한다, 우리나라 17세기 후반의 사회상은 좁은 성리학 철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와 부딪치면서 시대 금서였던 양명학의 장점까지도 西厓를 통해 받아들인 장계향은 말없는 실천으로 불합리를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전 생애를 통해서 인간을 향해서는 뜨거운 사랑으로 쓸어담으면서도 당파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대 지성인들이 보여준 허구와 비열함을 말없는 말로서 단호히 질타했던 큰 어머니로서 살아온 여성군자이시다. 어머니라는 이름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다운 존재이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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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김춘희 회장 약력
경북 영주 출생, 안동여고 졸업 1971년 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1977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4년~1978년 안동과학대학 교수 역임 2009년~현재 계명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 (여성군자 장계향 선생 연구) 현, 경상북도 김관용 도지사 부인 경상북도 새살림봉사회 회장 경상북도 새살림장학회 이사장 |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  입력 : 2010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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