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차성환
등에 꽃이 피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피어 꽃은 안전하다 나는 불안전하다 꽃의 뿌리가 간지럽고 근질거려 애인에게 뽑을 것을 지시했지만 애인은 거절한다 애인은 채식주의자다 꽃을 사랑한다 꽃봉오리가 만개하면 잡아먹을 심산이다 나야 꽃이야 다그쳐도 살살 등만 긁어 줄 뿐 꽃은 뽑지 않는다 나는 윗옷도 입지 못하고 등짝을 열고 다닌다 꽃이 죽으면 애인한테 나도 죽는다 나는 정작 한 번도 보지 못한 꽃잎의 개수와 색깔을 맞혀 보라고 애인이 퀴즈를 낸다 있지도 않은 꽃이 피었다고 한 건 아닌지 미심쩍지만 등짝에 핀 꽃 때문에 요즘 애인하고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 내가 쓸모 있어진 것 같아 나쁘지는 않다 가려움에 환장하겠지만 우리 둘은 내 등짝에 핀 꽃 때문에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꽃이 잡아먹히면 애인의 등짝에 호미로 밭을 갈아 내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가 자랐으면 좋겠다
▶사랑은 늘 깨지기 쉽고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실제로 있지도 않은 무언가로 인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환상 속 이미지를 통해 사랑은 간신히 작동하게 된다. ‘꽃’은 분명 사랑의 한계이지만 사랑의 다음 단계를 열어주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결국 서로의 등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연민과 슬픔이 찾아온다. 그렇게 서로의 텅 빈 등을 맞대고 앉아 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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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5년 『시작』 으로 등단
2018년 시작문학상 수상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
연구서 『멜랑콜리와 애도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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