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흔
김성백
소포를 열자 여름이 들어있었다
그림자는 먼저 움직이지 않는 자 어떤 그림자는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생각하다가 다치곤 한다 노랑에 맞서는 여우팥처럼
털을 생각하다니 여름은 계절이 아니라 짐승이 아닐까
여름을 꺼내자 그림자만 남았다
그림자가 생각을 갖게 되거든 그림자에 못을 박아두어야지 팔월의 그늘에 들어선 그림자는 더 두꺼워졌을까 녹아버렸을까
그림자 없는 소년과 그림자뿐인 소녀가 서로를 발굴했다 한 겹씩 벗겨낼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유물처럼 과거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해,
두 입술은 아주 더디게 지워졌고 쌍니은처럼 닮아갔다
똑같은 꼬리를 나누어 가진 우리는 바닥에 너무 오래 있어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펭귄처럼 뒤뚱거렸다 서로에게 앞자리를 양보하듯 무릎을 꿇고서
상처는 아무는 게 아니라 노을처럼 저무는 거라고 바람이 말했던가 전생의 깊이를 재던 유목의 수호신이 말했던가 얘들아, 더 가난해져야지 경계마저 버리고 자유로워져야지 지층 깊숙이 울음을 파묻던 쌍니은은 그제야 그림자에서 그늘로 넘어갔다
꼬리에게 물려본 사람은 안다 여름에서 하나씩 버리면 어른이 되지
그늘은 빛을 죽이는 꿈을 꾸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 창조주를 기다림이 어두울수록 끄트머리가 헐거워지는 그늘의 실패
그날, 절반의 피조물 더 진해진 여름이 멸망하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 그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가라앉는 꿈. 그 알 수 없는 기다림 끝에서 나는 몰래 숨겨두었던 여름과 만났다. 소년이면서 동시에 소녀인, 짐승이면서 동시에 식물인, 신이면서 동시에 피조물인 그것은 나이며 너였다.
둥근 것은 무엇이든 중심을 가지고 있다. 차운 바람을 헤집고 바깥을 버티는 억새 이삭의 껍질처럼 나는 결국 겨울이 되겠지만, 가장 얕은 자리에서 허튼 생각을 피우는 지금, 나는 기도한다. 당신의 안쪽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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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8년 계간 시현실 등단 2022년 제3회 이형기디카시신인문학상 수상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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