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경전
한성춘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거대한 목선 한 척 용문사 앞에서 출항을 준비한다 봄에 출발하여 가을에 돌아오는 멀고 긴 항로 돌아올 때 마다 만선이었다 만선의 몸을 비우고 또 비웠다 파도를 막아내던 뱃머리가 모질다 꼿꼿하던 돛대가 구부러지고 부러졌다 부러진 모서리에 거미 한 쌍이 둥지를 틀었다 바람과 생선이 놀다간 갑판 위 구멍과 균열이 살아있다 비우고 내어 주는데 천 백 년이 걸렸다
▶용문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용문산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를 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다르다. 겨울에는 거대한 빈 목선으로 보인다. 봄에 출항하여 여름에 고기를 잡고 가을에 회항할 때는 만선의 어선으로 보이고, 늦가을에 아름다운 단풍잎이 떨어질 때는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성자로 보인다. 천 백번 이상이나 출항하고 회항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말없이 열심히 일하여 모은 것을 아낌없이 비우고 내어주는 용문산 은행나무는 나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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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6년 계간 <스토리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문학공원 동인 시집 『해바라기 시창작법』 에세이 『그래, 달리면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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