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츄를 뽑다
유정남
불 꺼진 도서관을 나와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인형들의 방이 나를 기다린다
스펙의 의자에 묶여 굳어가던 뼈들이 말랑거리고 온종일 활자에 시달린 눈빛마저 흔들리면 꾸깃꾸깃했던 하루를 펴서 기계 속으로 밀어넣는다 간신히 잡혔다가도 허무하게 떨어지던 백 장의 이력서를 돌아다보면 어린 날의 한 조각 꿈이 만져져 오늘은 활짝 웃고 있는 피카츄를 선택한다 내 이십 대는 아래로만 떨어지게 조작된 인형 아무도 손 내밀지 않아 천 원짜리 몇 장이면 닿을 수 있는 오래된 추억을 뽑는다 등을 긁어주고 밀치고 놓쳤다가 집어올리는 시간이 캄캄한 책가방을 울리는 밤 잃어버린 단어를 찾은 듯 튀어나오는 너를 끌어안을 때 백만 볼트 포켓몬스터의 주인공을 만난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유리상자 속에 갇혀버린 인형은 나의 뒷모습 나는 지폐 한 장 들고 매일 나를 구출하러 간다
▶시를 쓰면서, 내가 타인의 아픔을 제대로 인식했을까,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과감하게 시 쓰기를 멈춘다. 시적 대상과 상황을 더 오래 관찰하고 더 깊이 사유하기 위해서다. 멈추고 쓰기를 반복하는 고통 속에서 타인의 아픔을 언어로 형상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줄의 시가 낮고 어두운 곳에서 아파하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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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8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당선 월간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 평택생태시문학상 수상 시집 『일요일의 화가 8요일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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