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 `각자 나이를 먹지 않는다` / 이명우 시인
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25년 07월 08일
각자 나이를 먹지 않는다
이명우
중앙박물관에 있는 왕은 오백 년 동안 밥을 먹지 않는다. 천 년 동안 술도 먹지 않는다. 오천 년 동안 수저도 사용하지 않는다. 가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의 그릇들은 식욕이 없다.
화병은 몇 백 년 동안 꽃을 기다리고 책은 이곳에 진열된 날부터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학이 날개를 펴지 않고 새들이 찾지 않는 소나무에는 햇볕이 들지 않는다. 물고기가 진열장에 걸려 있어도 어부는 없다. 불가마에는 장작이 없고 고려로 가도 경주로 가도 그때 그들은 없다. 금귀걸이만 있고 여인은 없다. 왕만 있고 신하는 없다. 빗살무늬토기에는 도토리가 없다. 돌칼이 있고 짐승이 없다. 돌화덕에는 불이 없다. 사냥꾼은 없고 노루만 있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이 함께 웅장하고 화려한 이곳, 황금 사리를 걸친 청동 반가사유상은 왜 수천 년 앉아 있어도 배가 고프지 않을까.
길고 붉은 길을 걸어 고려로 들어선다.
진열된 갑옷에 칼자국이 보이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적군의 붉은 피가 삼천 년 동안 마르고 있다. 적장을 물리친 투구가 적군을 물리친 발이 수천 년 침묵하고 있다.
벽란도에 들어선다.
항해무늬청동거울이 물 위로 나오고 물고기들이 바다로 들어오고 있다.
명나라가 고려인들에게 발급해 준 통행증이 유리 케이스에 누워 있다. 배들이 예산강 하구로 몰려오고 장사꾼들이 봇짐을 지고 나르는 장면이 스크린으로 지나가고 있다.
주인 잃은 신발과 체온 잃은 장갑과 임금 잃은 왕관이 조용히 살고 있다. 갑옷만 살아 박물관을 지키고 있다.
박물관 속, 그들은 각자 제자리에서 가야를, 신라를, 고려를, 조선을, 지키느라 나이를 먹지 않는다.
▶박물관 속 유물들은 사라진 존재들을 대신해 자리를 지킨다.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를 지키는 무언의 수호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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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관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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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25년 07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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