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은
김지윤
내가 모르는 운명이 정해지고 있다면 누군가 그것을 미리 그려 놓는 중이라면 물통을 쏟자 궁금해하자 밑그림 밖에서 벌어질 일 밀그림이 사라진 후 생겨날 것들을 섞어둔 물감에 다른 색이 떨어져 번지고 번지는, 물방울들이 흘러 가 닿을 곳 바람과 파도가 만드는 모래톱의 모양을 예상할 수 없듯이 그것이 또 언제 무너질지 모르듯이 때로는 망쳐서 더 좋은 그림도 있는 것이다 빈 그림을 채우는 건 때로 여백 빈 노래를 채우는 건 때로 침묵 사라질 웃음 사라질 고통 사라질, 당신 어떤 것은 해명되지 않고 지나가도 좋은 나이가 되었다 ▶존 레논은 “삶이란 우리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노래했다. 인생의 많은 사건들은 계획을 벗어날 때 생겨난다. 예상 못한 일들, 실수와 공백마저 삶을 채우는 색이 된다. 우연히 넘어지고 부딪히며 섞이는 생각과 이미지 속에 시는 만들어진다. 삶에도, 시에도 불확실성이 필요하다. 많은 것들은 흘러가고, 무너지고, 지워진다. 하지만 그 자리에 결국은 뭔가가 다시 흘러오고 세워지고, 채워진다. 사라지도록 놔두자. 그렇게 계속 살아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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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0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
제17회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
현재 상명대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
시집 『피로와 필요』 『수인반점 왕선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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