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달산 가는 길
진경
청명하던 하늘 먹구름 몰려와 빗줄기 우두둑우두둑
초월 터널 나서자 뗏장 구름 간데없고 8월 햇살 따갑게 눈 부시다
여주 초입까지 뒤쫓아온 도깨비 못다 삭인 분 억수 풀어헤 치더니
홍왕사 천년 기운에 잠시 꼬리 내린 여우
소달산 꼭지 오르자 게릴라 성깔 못 참고 한참을 더 퍼부어
여주 너른 벌판 비안개로 뒤덮고 나도 홀린 듯
흠뻑 젖은 능선 자락 작달비 속으로 처벅처벅 들어간다
태초의 불덩어리별 식힌 이 비
모든 생명을 있게 한 이 비에 젖은 작은 고양이
삼백 년 고독 세월에 가슴 뻥 뚫린 은행나무 품으로 뛰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 앞에서는 도리가 없다. 우산조차 소용없는 맹렬한 빗줄기를 마주할 때면, 피하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차라리 온몸을 적시며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편이 낫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이렇게 예고 없는 게릴라성 폭우를 통과하는 일이다. 맑은 하늘에 속아 무방비 상태로 걷다가도, 순식간에 몰려온 먹구름 아래서 흠뻑 젖은 채 막막한 길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 거대한 자연의 변덕과 생의 맹렬함 앞에서는 아무리 어른인 척 버텨보려 해도 누구나 길 잃고 떠는 여린 존재가 되고 만다. 그렇게 세상의 비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젖어들 때, 우리를 진정으로 품어주는 것은 한 번도 비를 맞지 않은 매끈하고 완벽한 지붕이 아니다. 모진 세월을 견뎌내며 제 속을 다 파내어준, 텅 빈 가슴을 가진 것들이다. 수백 년의 고독 속에서 제 한가운데를 기꺼이 비워낸 늙은 나무의 품.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만이 젖은 생명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갖게 된다. 뻥 뚫린 결핍과 아픔이 도리어 누군가를 살게 하는 피난처가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먹먹한 위로인가. 상처가 상처를 덮어주고, 비워진 가슴이 젖은 몸을 데워주는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역설 속에서 우리는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빗속을 걷고 있을 누군가에게, 내 가슴의 텅 빈 공간 하나를 가만히 내어주고 싶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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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22년 《서정시학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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