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 `시치미 떼다 ` / 한효정 시인
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입력 : 2019년 08월 21일
시치미 떼다
한효정
호두과자 속에 땅콩이 들어 있고 땅콩과자 속에 호두가 들어 있으면 어때 땅콩과 호두 속에 깃발을 꽂으면 어때
마음 한 조각 훔치는 일이 방을 훔치거나 눈물을 훔치는 일과 뭐가 달라 누구나 말 못할 사연 하나씩은 가슴에 품고 살잖아
처음 본 냉이꽃처럼 당신을 몰라보면 어때 어제 만난 사람처럼 명랑하게 하하 호호 허물없이 굴면 어때
오렌지를 거북이라 하고, 거북이를 슬픔이라 하면 어때 거북이 껍질 벗겨먹고 슬픔이랑 겨루어볼까
개똥밭을 걷고 걸어 발이 닳고 종아리가 닳아 몸통만 남으면 어때 그땐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여기가 바닥이라고 엎드려 울면 뭐해 냉이꽃 한 송이도 바닥을 뚫고 나오는 걸 당신과 내가 앉은 자리는 꽃들이 눈물 훔치는 자리 견디는 거지 궁둥이를 견디는 변기처럼 지긋지긋하게
▶추석날 오후 아버지와 올케, 조카들, 딸들과 함께 선유도공원 산책을 갔다. 기억을 잃어도 공원 가는 길은 잊지 않으신 아버지는 신이 나서 앞장섰다. 당신 뒤를 졸레졸레 따라다니는 다 큰 손주들이 대견한지 자꾸만 뒤돌아보셨다. 아버지에게 손자손녀들은 당신이 피워낸 꽃이었다. 여기서 한번 쉬어 가자. 버스정류장에서 아버지는 멈춰 섰다. ‘처음 본 냉이꽃처럼’ 언제 몰라볼지 모르는 손주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버지의 화양연화일 터였다. ‘어제 만난 사람처럼 명랑하게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며느리와 딸, 그리고 손주들. 그들이라 해서 아픈 사연이 없을까. 그들에게도 ‘여기가 바닥이라고 엎드려’ 우는 밤들이 있었을 것이나, 그러면 어때. 바닥을 뚫고 나온 냉이꽃처럼 웃고 있는 얼굴들은 청초하기만 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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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정시학 신인상 서정시학회 동인 시집 『나비, 처음 날던 날』 『사프란블루』 에세이 『지금 여기,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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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19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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