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 `날짜를 버리다` / 정지우 시인
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입력 : 2019년 08월 14일
날짜를 버리다
정지우(鄭誌友)
감자에서 멍든 햇볕이 푸른 싹으로 빠져나가고 있어 반쯤 비어가는 목소리를 들었던 날처럼
우유팩 속에서 팽팽하게 부푼 공기 보관해 두고 싶은 날짜와 입술의 뒷맛도 버려야만 했어 한 컵의 액체로 짓눌러야하는 목을 메이게 한 말에 대해 잃어가면서 잃은 줄 모르는 생략에 대해 엄마는 입맛이 변한 탓이라고 했다
오래된 관계처럼 밀봉한 채 깊숙이 밀어 넣은 음식물은 위와 아래 마구 뒤섞이며 캄캄해지지 꽉꽉 채우면 잊을 게 많아지고 찾을 것만 생각해서 주위를 잃어도 모르지
녹색은 잉여를 찾아가는 시간 냉장고엔 유실되고 미뤄둔 우리들의 날이 무중(霧中)한데 너인지 나인지 변한 것을 모르면서, 부패중인 것은 금방 알아차리게 돼
날짜에서 치즈 냄새가 났다 자꾸 버리면 버리는 것에 익숙해지지 왜 날짜들은 싱싱한 것들을 끌고 가지 못하나
죽은 식물에서 기어 나오는 지렁이를 보았어 식물이 사라진 형태로 엉켜 진보하는 날을 온몸으로 꿈틀거리며 갔지
우유를 꼭꼭 씹어 먹어야 된다는 말이 이미 상해있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현대인들은 바쁘다. 찬찬히 생각할 곳도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다. 어떤 여분이나 여백을 배제하는 시간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 저마다 다르지만 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거나 혹은 찾고 싶은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닌가? 사물은 가장 가까운 근처의 존재성을 드러내지만 불충분하다. 위로의 시간을 나눌 수는 있지만 감정의 전이와 살아 있다는 의미들을 일깨우지는 못한다. 그렇다지만 시에서는 사물에 나를 비춰보고 돌아보고 자각하는 완벽한 대상의 축을 이룬다. 어느 날 냉장고 속에서 찾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까만 봉지에 뭉텅이로 들어 있는 것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고,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물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도 무중하고 가물거리고 먹먹하기만 하다. 아픔이 아픔에게 가닿지 않는다. 모든 인과 관계로부터 우리는 객관적일 수 없으므로 외로울 수밖에 없고 이유 없이 서글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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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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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19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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