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 `바람소리` / 이경 시인
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입력 : 2020년 06월 16일
바람소리
이경
누가 이 밤에 흰 생 무를 썰고 있네 시간의 발자국 소리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무쇠 식칼 시퍼런 날 아래 한 절벽이 잘려나가고 또 한 절벽이 하얗게 눕는다 지금처럼 그 때도 무서운 역병이 돌아 수상한 바람이 앞발톱을 세우고 어린 것들 이마 위를 어슬렁거리는 밤에 어머니는 무쇠 식칼로 생 무를 썰고 나는 연필심에 침을 묻혀 숙제를 했다 무엇에 놀라기라도 하듯 등잔불이 쿨럭이며 수염을 길게 그을면 우리는 긴 역사책 같은 바람 소리를 읽었네 어둠 속에서도 한 발 삐끗하는 법 없이 거두절미 단도직입 어머니 생 무 자르는 칼도마 소리에 바람도 문밖에서 기세가 꺾이고 병마도 발꿈치 들고 저만치 비켜 갔어라 병마도 발꿈치 들고 저만치 비켜 갔어라
▶이번 코로나 환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시인의 무력함이 부끄러웠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강하게 발휘되는 우리 민족성의 근간에 숨어 있는 희고 빛나는 섬유질을 생각해봤습니다. 잦은 사변과 외침을 겪으면서 삶을 지탱하고 발전시켜 온 한반도 어머니들의 힘이 어찌 ‘무 자르는 힘’ 뿐이겠습니까만. 칼을 잘 다루는 일이란 더구나 통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채 써는 작업은 매사에 힘의 안배와 사려 깊은 주의력을 필요로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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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93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 제5회 유심작품상 수상 제19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 시집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 『흰소, 고삐를 놓아라』 『푸른 독』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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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20년 0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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