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민 시인이 만난 오늘의 시 - `메모지 한 장` / 염선옥 시인
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입력 : 2020년 11월 24일
메모지 한 장
염선옥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놓인 것을 훑는다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문을 여는 습관처럼
에탄올 70% 함유 저자극성 간편 촉촉 손 소독제 입구에 놓아둔 손 소독제를 바르며 청결 위생 살균 클린을 중얼거린다
종이컵, 여주쌀 10kg, 손소독제, 피죤, 계란, 클리넥스 손에 잡히는 주머니 속 메모지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을 볼 때면 어리둥절해서 툭 친다 깨진 균형 속에 안식을 찾는 나이기에
그에게 전화를 걸면서 구겨 메모지를 탁자 위에 던져두고 집의 가장 깊은 곳으로 청결 위생 살균을 중얼거리며 걷다가 가장 깊은 곳에서 멈추고
청결 위생 청결 위생 중얼거리며 가장 늘어진 옷으로 갈아입는다 주머니에 다시 손을 찔러 넣는다
손은 항상 무언가를 쥔다 주머니 속 단추, 구멍을 더듬고 둥근 테두리에서 다시 안정을 찾는다
뭐라도 버리지 않으면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 같고 어느 날의 발자국이 따라 들어올 것 같고
탁자 위 메모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어 둔다
시계를 바라보며 그가 돌아올 시간을 거꾸로 세고 메모지의 재료를 훑으며 음식을 그린다
음식을 먹는 그가 보이고 그를 보는 나도 보이고
해는 자주 둥글게 몸을 말아지고 그런 하루는 따스하다
그가 가장 깊은 곳이 있는 방향으로 발자국을 주으며 걸어오고 있다
▶일상은 안정적인 공간에서도 개인의 불안으로 채워져 있다. 뭔가를 쥐지 않으면,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은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했다. 질서 있는 공간에서 살기 위해 질서를 따르던 시적 화자는 자기만의 공간에서는 질서를 저버리고 싶다. 뭔가의 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메모지라는 것은 일회용이고 생활품목을 사는 즉시 버려지는 쓸모없는 것이다. 화자는 그런 메모지를 구겨 식탁에 던져 놓고,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자신의 처지라도 되는 듯이. 집은 바슐라르가 말한 내밀한 공간이 가져다주는 평온함이 사라졌다. 그래도 집은 따스하다. 상상만으로도 따스하다. 둥근 주머니 속 단추처럼. 나를 생각하며 돌아오는 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평온이 자리한 내밀한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자의 불안은 나의 불안이었다. 그런 ‘나’를 그려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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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7년 《창작 21》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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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민 기자 / blue2140@hanmail.net 입력 : 2020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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