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라는 문장
김향숙
종이를 구기면 나무들의 얇은 비명이 들려옵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에선 더더욱 북쪽을 편향하는 나무의 울음을 듣습니다 아마도 나무는 오래전 울음을 나이테에 새겼을 것입니다
여름 숲은 제지 공장의 월요일 같습니다 꽃과 나무의 기형은 비극을 저술해 놓은 문자입니다 열매가 달린 나무는 잼이나 시럽을 만드는 안내서 거기 사는 짐승들은 백과사전을 증언합니다 잎사귀가 된 울음에 밑줄을 긋고 꽃의 비명을 받아 적습니다 오늘은 종이 앞에 펜을 들고 접힌 계절을 풀어 봅니다 나무의 아우성을 소리 없이 받아씁니다 종이가 된 나무는 이후, 라는 문장을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난 뒤 구깃구깃 주름을 얻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처음 뿌리의 언어를 가르쳐준 흙과 바람과 태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시를 받아적지 못한 종이는 파지로 구겨집니다. 나무는 애초에 이후의 문장을 알고 있습니다. 순순히 구겨지고 찢어지는 나무들은 참 유순합니다. 생전에 북향을 편애한 이유로 속울음을 감추고 있는 나무들의 울음을 그때 듣습니다. 이후의 이후는 또 어떻게 흘러갈까요. 예감할 수 없는 이후여서 나는 또 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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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해동공자최충문학상 대상, 황순원디카시 대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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