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진에서*
황명강
당신은 밥상을 차리고 무화과는 부드럽게 익어간다 편안히 누운 탐진강 물처럼 열망을 닦아낸 밥상은 의외로 담백하다
그윽한 들녘, 물빛 햇살을 썰며 당신은 노련하다 서두르지 않는다 무화과는 아주 천천히 익어 가는데 밥상 위엔 서편제 소리 같은 파도 수만 장 바삭바삭 천년학의 한 날개마저 먹어치운 당신은 저만치 물러나있다 도대체 담담하다
나는 밥상 앞에 있고 속 허물고 있는 저 무화과나무, 단지 주린 배를 채우는 고결한 구애임을 고백한다 전어구이 홍어회 같은 애인들 이곳에선 우연히 흘러온 폐선도 주인이 된다
선학동 나그네처럼 문득 지워지는 어느 날인가 익숙하게도 무화과는 떨어지고 당신은 또 밥상을 차리고 그 길 걸으며 난 처음인 듯 흔들릴까, 정남진 그대 앞에서
*전라남도 장흥은 광화문을 기점으로 정남쪽에 있어 정남진으로 불린다, 장흥 선학동 마을은 이청준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무대로 이 소설은 임권택감독의 영화 ‘천년학’의 원작.
▶2009년 가을의 초입에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뭉쳐 버스에 올랐었다. 2007년 봄엔 강진으로 가서 다산초당, 백련사 동백을 만났고 김영랑 시인의 생가에도 들렀었는데, 이번엔 장흥으로 향했다. 천년학 세트장은 선학동마을 가까운 바닷가에 있었다 세트장 아래 폐선을 붙잡고 있던 잔잔한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가까운 곳엔 잘 익은 무화과들이 눈길을 끌었다. 매우 선명하게 다가온 이 풍경들이 시인에게는 정남진(장흥)이 누군가를 위해 잘 차려놓고 기다린 밥상 같았다. 평온한 풍경 저 너머엔 안타까운 사랑의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세트장. 그러나 무심한 듯 펼쳐놓은 풍경들은 물론이고 우리 일행이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일까지 그저 담담하게 맞이하고 담담하게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을 스쳐가게 될 것인가.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삶이 교차되는 지점,
해마다 무화과는 열리고 떨어지듯이 누군가는 아픈 사랑에 기대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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