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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남 시인의 "얼룩진 벽지"


윤승원 기자 / gbn.tv@hanmil.net입력 : 2012년 05월 08일
2012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얼룩진 벽지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 GBN 경북방송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2012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이 뜻밖에 현실로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하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벅차오릅니다. 심장이 아직도 쾅쾅 뛰고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들이 현실로 이어져 기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고통이었습니다. 가족과 일과 시쓰기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맞추며 제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새로 사온 시집에서 좋은 시를 만나면 자꾸 꿈이 커갔습니다.

꿈은 꾸기만 해도 행복한데 이루면 더 행복하다는 걸 알려주신 '국제신문'과 부족한 제 시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문정희 시인님, 최영철 시인님, 박남준 시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의 은유를 알게 해주신 존경하는 정일근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한 이팝시 동인 문우들, 삽량문학회 식구들, 오랫동안 묵묵히 지켜봐 준 사랑하는 남편과 든든한 아들 휘성이와 첫 번째 독자로 지목되어 기꺼이 작품평을 해준 딸 슬아. 그리고 공부방 꼬마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새해도 모든 분들이 시를 읽으며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약력 1962년 충남 연기 출생. 현재 양산시 삽량문학회 편집장. 이팝시 동인.



[2012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윤승원 기자 / gbn.tv@hanmil.net입력 : 2012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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