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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진의 역사산책(40회)

칠지도는 진왕의 후손에게 보낸 백제의 선물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입력 : 2015년 02월 02일
ⓒ GBN 경북방송

오늘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 GBN 경북방송

칠지도 앞뒤면 사진

네 오늘은 한일 고대사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는 칠지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칠지도요? 칠지도가 어떤 칼인가요?
네. 칠지도는 1874년 나라 현 텐리 시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에서 발견되었다(사진). 당시 신궁을 관리하던 칸 마사토모는 신궁에 비밀리에 전해오던 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몸통에 6가지가 붙어있는 녹슨 칼이 하나 들어 있었다. 심하게 녹슨 칼에 명문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쇠줄로 녹을 갈아내 금으로 쓰인 명문을 알아냈다. 칼에는 총 6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글들에는 칼의 이름이 ‘칠지도(七支刀)’라는 것과 칼을 만든 내력이 적혀있었다. 칠지도는 당시 수준으로는 최고의 강철로 만든 칼이다.

명문도 있고 칼을 만든 내력도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요?
네, 칠지도는 한국과 일본 고고학계에서 첨예하게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유물 중 하나이다. 일본 쪽에서는 백제왕이 만들어 일본왕에게 헌상했다고 하고, 한국 측에서는 백제왕이 일본 왕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들을 한 번 살펴볼까요? 먼저 일본 측 주장은 어떤 것이 있나요?
네, 일본에서는 백제왕이 만들어 일본 천왕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헌상설’은 호시노 히사시(星野恒)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는 신공황후 49년(369)년에 왜가 가야의 일곱 나라를 정복하여 백제에게 주었더니, 3년 후에 사례하는 뜻에서 백제가 사신을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서기』신공황후 52년조에는 “52년 가을 9월, 칠지도(七枝刀) 일구(一口), 칠자경(七子鏡) 일면(一面) 및 각종의 중보를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헌살설’을 반박하는 한국 측 주장은 어떤 것이죠?
일본의 ‘헌상설’을 반박하는 주장이 광복 후 북한의 김석형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이른바 ‘하사설’이다. 김석형은 칠지도는 4~5세기에 백제가 강성했을 때 백제왕이 황제의 입장에서 일본에 있던 백제계 분국(分國)의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김석형은 '제후왕에게 줄 만하다.' '후세에 남기라.' 라는 칠지도 속 문구를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했다.

양측의 주장은 아직 까지도 유효한가요?
그 후에도 많은 주장들이 있지만, 대체로 일본은 ‘헌상설’을, 한국은 ‘하사설’을 지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는 색다른 각도에서 칠지도의 제작 동기를 추정한다.

다른 각도라니요? 새로운 관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지요?
새로운 관점은 칠지도의 형상 자체가 어떤 상징성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관점에서 설명하려면 먼저 일본 천황가의 성격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한 번 들어볼까요?
일반적으로 일본 천황가가 부여계와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홍윤기교수는 ‘왜 나라 백제인 왕인 오우진 천황(應神天皇)’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르다. 일본 천황가는 단군왕검계 진인(역사에 나오는 진국, 진한, 변진 사람)들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문화적으로 천황가는 진국, 진한과 관련된 사람들과 관련 있다.

천황가가 단군왕검 사회의 후예와 관련 있다고요?
네 천황가는 반도의 진인들이 열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일본 중부지역(나라)을 개척한 야마토의 시조인 오우진 천황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이다. 야마토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眞[眞, 眞人(마히토: マヒ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들이 백제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성호도 오우진계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했다(1982).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황후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제가 발표한 책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2014)에서 밝혔듯이 박혁거세도 진인이다. 그는 충청도 대전, 아산 지역에 있던 진국의 후예다. 『삼국지』에 보면 진한은 진국의 후예라는 기록이 보인다. 박혁거세가 진인이었음을 그들이 단군왕검계 문화유산인 제정일치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확인된다. 또한 석장리 암각화에는 곰 발자국이 있다. 곰신앙이 사로국 초기에까지 전달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헌자료도 있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 그 단서가 남아 있다. 수인(垂仁) 천왕 3년 「신라 왕자 천일창」조를 보면, 신라 왕자인 천일창(天日槍)이라는 인물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가져간 예물 중 ‘웅신리(熊神籬)’라는 것이 있다. 웅신리는 휴대용 곰 신단을 말한다. 일본 천황에게 ‘곰 신단’을 가져갔던 것이다. 천일창은 박씨계 신라왕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 천황가가 진인들과 관련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있나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도 일본을 정복한 기마 정복민족의 지도자는 3세기 중 삼한을 지배한 진왕의 후손이라고 했다. 진인계통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 후의 역사기록에서 끊임없이 자신들이 마치 삼한에 연고권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오진(應神)왕 3년(392)에 왜의 주도로 백제 아신왕을 즉위시켰다고 하며, 유랴쿠(雄略)왕 21년(476)에는 구마나리(웅천 혹은 공주)를 문주왕에게 주어 백제를 다시 일으켰다고도 했다. 또한 『송서』 왜인전을 보면 왜왕이 한반도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제나라(479~502) 황제는 왜왕(倭王)에게 ‘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군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제수하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기록은 왜왕이 진왕의 후예로서의 연고권을 주장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부여계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는 진인들의 나라였다.

천왕가가 단군왕검 사회의 후예인 진인들과 관련 있는 것과 칠지도가 어떻게 연결되죠?
앞선 이야기들에서 단군왕검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했다. 단군왕검사회의 문화적 특징은 신단수라는 우주목을 통해서 하늘과 소통하던 사회였고, 곰을 신령스런 동물로 생각했고(웅녀), 칠성신앙이 주 신앙이었다. 그런데 칠지도는 바로 단군왕검사회의 종교문화를 반영한 예물로 볼 수 있다. 신단수와 칠성신앙을 결합한 예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지도는 누가 만들어서 상대방에게 주었을까요?
칠지도는 백제의 최전성기였던 근초고왕(346~375)이 왜왕에게 선린의 표시로 준 예물로 보아야 한다. 당시의 국제 정세 상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하고 있었다.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죽였을 뿐 아니라 남으로는 가야지역과 마한 소국의 지배를 확대해 나갔다. 백제는 외교적으로 자신들을 편들 세력이 필요했다. 마침 자신들의 왕비족과 친족인 왜왕을 자신들의 우호세력으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칠지도를 만들었을까요?
칠지도는 바로 왜왕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신물(神物)이기 때문이다. 왜왕이 진인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서 진인의 종교의식, 즉 칠성신앙을 반영한 상징물을 만들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도학교수는 “칠지도는 우뚝 솟은 산상에 있는 신목, 즉 단군신화의 신단수(神檀樹)와 같은 애니미즘적 신앙의 대상을 도검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신단수를 상징한 것이라구요?
네 칠지도는 신단수뿐만 아니라 칠성신앙도 결합시킨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칠지도가 기록된 신공황후 52년 조를 보면 백제에서 칠자경(七子鏡)도 선물했다고 한다. 이 칠자경과 칠지도 모두 7수를 의식하고 있는데 이는 칠성신앙을 의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해볼까요. 결국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게 선린관계를 갖자는 의미로 전해준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네, 여러 정황들을 고려하면 칠지도는 당시 왜 왕실의 종교적 정서, 즉 그들은 칠성(북극성)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칠지도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 왕실과 선린관계를 의식하고 만들어 보낸 의기로 볼 수 있다. 일본은 7세기 초에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하는데 이 때 천황은 ‘천황대제는 북극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된다.
진병철 기자 / 5084474@hanmail.net입력 : 2015년 0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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