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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펜션] 한옥체험 월암재.

새롭게 단장한 월암재. 김호 장군의 얼이 서려 있는 명소.
김경효 기자 / 입력 : 2010년 08월 27일
경주 전통 고택 체험장 월암재를 찾았다.

김호장군을 기념 하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김호장군

월암재의 주인공 김호장군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주에서 왜군을 물리친 무신으로 본관 경주. 자는 덕원 호는 월암으로 1534-1592(선조 25년) 58년간 사셨다.

1570년 (선조 3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 봉사로 관직생활을 끝내고 향리에 거주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왜군이 대거 침범하자 경주부윤 윤인함은 왜병의 선봉을 피해 죽장현으로 피했고
비어있는 경주 읍성을 지키기위해 김성일에 의해 의병도 대장으로 임명 되었고
아래에 진사 전 현감 송토대 극후(후 대군사부),최진립(후 공조참판 증 병조판서)등을
부하로 두어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다.

↑↑ 안방에서 바라본 월암재 대청마루
ⓒ GBN 경북방송


경주부근을 돌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의 대오를 편성헤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고
왜군은 영천을 빼앗긴 뒤 의병이 경주로 진출할 것에 대비해 양산 주둔 일부병력을
경주에 보내기로 하고 8월 1일 언양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호의 의병은 왜군이 경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를 공격하기로 하고
1천4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언양으로 향했다.

의병의 선봉이 경주를 벗어나 노곡에 이르렀을 때 왜군과 조우하였는데,
의병은 함성을 올리면서 왜군을 공격하였고,
불시에 공격을 받은 왜군은 당황하여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 마루 옆방
ⓒ GBN 경북방송


김호 장군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달아나는 적을 추격해 섬멸하고 이 전공으로
부산첨사에 임명 되었다.

그러나 경주부에 주둔한 왜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도로를 막고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진격해온 적의 기병500명과 맞서 싸워 적을 궤멸시키고 전사하였다.

사후에 곧 영상관에 증직되고 1758년(영조 34) 참판에 추종되었다.
동경통지권 12, 여지승람, 선조실록, 영남인물고, 연려실기술 등에 휘자가 기록되어 있다.

맏 아들 김이충 의 벼슬은 주부 였고 임진 란 당시 예빈시 주부로서 선조를 호종하였고
아버지의 순절소식을 듣고 임금님의 재가를 얻어 경주로 내려와 급히 어머니 정씨에게
도착하니 어머니께서도 자진을 하였으므로 이충은 가슴을 치며 울다가 드디어 절명했다는 기록이 원종공신에 기록되었다.

↑↑ 멋진 월암재 김호장군님도 새롭게 탄생한 월암재를 기뻐 하실듯
ⓒ GBN 경북방송


그 후 호성원종공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 되었다.

둘째아들 김이현은 임진왜란 때 흥해 군수로서 부친을 따라 정의를 외치다가
마침내 부친이 전사하자 상복을 입고 곽재우의 막하에 도달해 많은 공을 세웠다.

또 문천에서 문천회맹에 참여했으며 팔공산회맹,구강회맹,당교회맹등에도 참여하셨으며
관찰사 한효순과 함께 명나라 군대를 영접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당고전투 후에
임금님으로부터 공훙록을 하사 받았다.

셋째 아들 김이홍은 아버지와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효행으로 군자감 참봉에 임명
되었다.

↑↑ 뒷 동산에서 바라본 월암재
ⓒ GBN 경북방송


김호장군 이야기

(이 이야기는 본 기자가 김호장군을 취재 하면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스토리 이다)

김호장군 생가 위치는 경주시 탑동 633번지이다.

장군이 살았던 집 주위의 가까운 주변 관광지는 포석정. 오릉. 삼릉. 남간사터.
일성왕릉. 명활산성터. 재매정. 남산의 유적들. 숭덕전등이 있다.

어려서부터 경주에서 살았다면 현재 존재하는 다양한 경주의 유적들을 체험 하면서
그 당시 오백년 역사의 경주를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왔을 것이다.

김호장군의 어릴 적 기록이 남겨 진 것이 없다.

↑↑ 김호 장군 공적비
ⓒ GBN 경북방송


선조 경오년(1570년 선조3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김호는 용기와 지략이 있어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는데 평민으로 지낸지 수 십년에 봉사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말과 활에 아주 능했던 김호장군
ⓒ GBN 경북방송


그러나 부모들의 기록은 남아있다.
월암의 고조부는 도호부사 휘 (울주부사)이며,
증조부는 호조정량 휘 이권 이며, 조부는 충순위 보공장군 휘 원재이며,
부는 내금위 어모장군 휘 숙반이며, 진외조는 통훈대부 군자감판사 휘 이직겸이며,
외조는 병마우후 휘 김한보이다.

동경통지, 낙외재집,용사세강록등에 휘 자가 기록되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월암이
평민이었다는 기록은 잘못 된 기록이다.

김호장군은 36세 때 무과에 급제했고 56세 때 은퇴를 한 뒤 고향에서 살다가
임진란이 발발하자 의병들을 모으고 각종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뒤 노곡전투에서
전사한다.


장군의 자손들의 기록은
큰 아들 김이충은 궁에서 예비시 주부를 지냈고
둘째 아들 김이현은 흥해군수로 근무 했고
셋째 아들 김이홍은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둘째 아들 김이현은 김호장군이 20~25세때 출생 했다고 추정하고
임진란 당시 나이는 흥해군수로 근무한 것으로 보아 30~35세 정도로 추정된다.

셋째 아들 김이홍은 김호장군이 23~27세 사이에 태어났다고 추정하고
임진란 당시 둘째 김이현의 나이는 30세 전후였을 것 이므로
김 이홍은 그보다 3~4세 어린 25세에서 30세 정도가 되었을 것이고
김이홍과 최진립은 친구였을 가능성이 있다.

최진립의 나이 25세때 임진란을 맞았다.

김이홍의집(식혜골)과 최진립의집(내남이조리)이 6.3km의 거리였다
이 정도 거리라면 같은 서당에 다녔을 것이고 자주 만났을 것이다.

↑↑ 최진립과 김이현 - 오성과 한음
ⓒ GBN 경북방송


어릴 때부터 김이현과 최진립은 자주 서로의 집을 왕래하면서 지냈을 것이고
당연히 상대의 부모들과도 잘 알고 지냈을 것이다.


임진란 이후 최진립이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임진란이 나기 2 년 전에 친구 김이홍의
부친 김호 장군이 은퇴를 해서 집에 기거하고 있었고 가끔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던 중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이홍과 최진립은 김호장군의 휘하로 들어갔을 것이고
둘은 김호장군의 여러전투에 참여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통해 애국을 실천하신 김호장군
ⓒ GBN 경북방송


또한 김호 장군으로부터 많은 병법을 배웠을 것이고
또 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임진란이 끝난 뒤 최진립은 무과에 급제 했으나 김이홍이 봉사 벼슬을 받았지만
관직에 올랐다는 기록은 없다.

최진립이 임진란이 끝난 후 무과로 진출을 한 이유는 전장에서 같이 전투한 김호장군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린 학창시절 훌륭한 스승의 모습에 감동을 하거나 존경하는 분의 격려 한 마디에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한 사람은 수 없이 많다.

최진립 역시 전장터에서 김호장군의 충절된 모습과 김호장군의 따뜻한 격려에 감동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승리의 기쁨도 맛보았을 것이고 나라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가치관을 정립한 최진립은 당연히 무예와 병법에 큰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고
양반가문의 자녀로 무과로 진출했을 것이다.

↑↑ 최부자집의 시조 최진립 장군
ⓒ GBN 경북방송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표본이요 대한민국의 자랑인 경주 최부자집의 시조는
최진립 장군이다.

그 최진립장군이 있기 까지는 김호장군의 영향력이 크다.

한 명의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며 선하게 끼친 영향력은 반드시 자자손손 후대에 까지
그 정신이 살아 계승됨을 김호장군의 삶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

김호장군과 최진립장군 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지금도 최선의 삶으로
아름답게 경주를 대한민국을 빛내고 계신 후손들께도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주소 : 경주시 탑동 749-2번지.
예약 : 054) 742-1950 010-2799-0584
김경효 기자 / 입력 : 2010년 0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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