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대조필
고영숙
이 책은 1942년 간행된 편년체 원본이다 쉰 적도 없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전 생애의 기록이고 삶의 보고서다 수많은 배경 중 뼈대 있는 정본을 세우고 종종 바람을 타고 다니던 호시절은 용을 써도 먹히지 않아 생략한다 구겨진 쪽의 빗금 간 시간이 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저항 없는 덮어쓰기로 찢길 일만 남은 목차가 먼지를 쓸어내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우는 낯선 필체 위태로운 행간마다 둥둥 떠다닌다 바람은 곳곳마다 무수한 구멍을 내고 낡은 문장들에서 물큰한 울음소리가 묻어나온다 역주행에 쓸려간 물살의 흔적 기진한 몸뚱어리가 사본의 발끝으로 점점 지워진다 서늘한 등짝, 목구멍에 밀려드는 어둠처럼 흩어진 슬하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지문처럼 찍히는 밤 페이지를 넘길수록 몸피가 줄어든다 풀이 죽은 문장들, 맨 끝줄 가까스로 매달리거나 긴 묵독 끝 더듬더듬 통증의 출처를 필사한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낡은 종이 아직 폐기되지 않아 원본대조필 효력이 유효한 아버지,
▶어이할까, 여기저기 눈발처럼 바이러스가 흩날리고 외롭고 고단했던 계절 앞에 노년의 발이 주저앉는다. 때론 시간 앞에 굴복하지 않고 생과 사투를 벌이지만 사본의 발끝으로 점점 지워져 종잇장처럼 얇아진 아버지. 다시 오는 아버지의 봄은 튼튼하고 굳건한 봄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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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2017년 『제주작가』 신인상 2020년 『리토피아』 신인상 다층 동인 제주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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