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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상처에게 선물을 / 악마는 틈새로 들어온다(8)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3월 20일
ⓒ GBN 경북방송

  아이들이 돌아간 후 설희는 문단속을 하고 교실을 나섰다. 일반 학급에서는 보충수업을 하고 있었다. 교사의 말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왔다.

“3차 함수는 물결표 모양이며 변곡점을 가진다.”

변곡점이란 곡선이 요에서 철, 또는 철에서 요로 바뀌는 자리를 나타낸다. 물결 그래프가 오목해지거나 볼록해지기 시작하는 점이다. 설희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세계 이야기라고 생각하다 걸음을 딱 멈췄다. 곡선이 아래로 끝까지 떨어지면 변곡점에서 다시 상승한다. 자신의 삶은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먼 세계라 생각했던 3차 함수 그래프가 바로 자신의 삶 같았다. 변곡점까지 떨어져 내리는 자신이었다.

‘인생은 끝없이 오르내리는 물결이 아닐까. 극대점 크기가 다를 뿐 매한가지인 3차 함수 물결 그래프. 그래, 어차피 그런 거지.’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정을 내려갈 때 학생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이 반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아. 정신이 해이해지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어. 발발이처럼 나다니지 말고 일찍들 집에 돌아가, 알았어?”

설희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발발이처럼 나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원우의 집 방향이었다. 그곳으로 가지 않으려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의 뒷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기찻길이 끝없이 뻗어있다. 그 아득한 소실점에 눈이 아프다. 주인공이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설희는 멀리 보이는 철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고 싶다.
그냥 가고 싶다.
기찻길 따라 끝없이 가고 싶다.
가다 보면 끝이 나올 거야.

자신의 방황도 그렇게 끝이 날 거라는 생각을 하자 기운이 났다. 방음벽 쪽에 붙어 걸어가다 철로 보수 작업반과 마주쳤다. 인부가 돌아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저런 것들 때문에 열차 사고가 난다고.”

옆의 인부가 덧붙였다.

“아, 왜 철길로 오냐고.”

“저 애, 자살하려는 거 아니야? 그 봐, 지난봄 서울 도봉구 방학동 건널목 사고 말이야. 그게 어디 기관사 한 사람만 잘못한 건가.”

방학동 갈월 건널목사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설희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지난 5월 도봉구에서 청량리역으로 가던 여객용 동차가 건널목을 지나던 대형 탱크로리의 옆을 들이받아 19명이 죽었다. 안전 불감증과 방심 때문이었다. 어떠한 사고든지 방심이 무르익어 절정에 다다르는 동안 조금씩 위험의 기미를 보여준다. 정신에 틈이 생기면 마음이 콩밭에 가기 마련, 위험의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대로 질주하는 것이다. 열차의 탈선은 전복을 의미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설희는 왜 여기를 걷고 있는지, 자책했다.
거리에 불빛이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설희는 어둠과 빛이 조화를 이루는 밤이 편안했다. 어둠 속에서는 가짜 자신이 숨고 진정한 모습의 자신이 일어났다.
원우의 집을 외면하여 동네 언저리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발길이 원우의 집으로 돌려졌다. 오랜만에 찾아온 원우의 집이 낯설다. 이제 동전이 있어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 대문 밖에 내놓은 부러진 의자와 폐기물이 든 마대자루가 흉물스럽다. 설희는 닫힌 대문 틈에 눈을 대고 안을 들여다본다. 도로의 가로등이 집안을 비춘다. 마루의 유리문이 열려 있어 대청마루가 훤히 보인다. 화단에는 국화꽃 무리가 쓰러져있다. 노란 빛도 어슴푸레하다.
설희의 체념은 먼발치에서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저 그들 가족 중 누구라도 대문 앞에 나타나 준다면 원우의 근황을 묻고 싶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제 색깔을 잃은 희붐한 국화꽃…… 설희의 눈동자가 흐려진다. 빈집이었다! 모든 가족이 집을 비울 일은 뭘까. 그에게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혹시 장례라도? 이사를 간 걸까? 그러고 보니 설희는 원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은 몇 명인지,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희망을 품었는지, 대학에서 전공은 뭔지, 전혀 모른다. 확실히 아는 것은 전화번호 하나, 아버지가 운수회사를 운영한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설희보다 일곱 살이 많다는 것뿐이다. 설희는 갑자기 막막해졌다. 먼 훗날 도시계획으로 집이 허물어진다면 찾을 길이 없을 테다. 그를 추억할 때 이을 끈이 없다. 없다, 없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설희는 계속 걷는다. 어지럽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점심도 걸렀고 저녁도 먹지 않았다. 그래도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지나가던 택시가 라이트를 비추며 설희 앞에 섰다. 설희는 가방 속에 학급비를 거둬놓은 봉투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순간 손이 빠르게 택시 문을 열었다. 운전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어디가?”

“일루 쭉 가 주세요.”

남자가 뒤로 돌아보았다. 인상이 특이하다. 가느다랗게 찢어진 눈으로 눈웃음친다. 설희는 창밖을 내다본다. 열어둔 운전석 창문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 소리가 아우성치듯 들린다. 세상이 설희를 비웃는다. 저희끼리 낄낄거린다.

“창문 좀 닫아주세요.”

설희가 몸을 떨며 말했다.

“담배 냄새 때문에.”

남자가 창을 올린다. 설희는 창에 이마를 대고 거리를 내다본다. 행인들은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을 것 같다. 심연에 묻어 놓은 원우의 얼굴이 달이 되어 검은 구름 속을 빠져나온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설희는 머리를 흔든다. 차는 어둠 속을 달린다. 사막을 걷는 여행자의 기분이다. 문득 의식을 돌이키면 모래 언덕에 쓰러져 있고 다시 머리를 들면 모래 구덩이를 기어가고 있다. 설희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별빛이 쏟아져 내리던 지난여름의 강변을 마음속으로 더듬는다. 남자가 또 묻는다.

“어디 가는데?”

“길을 잘 모르겠어요. 조금만 더 가 주세요.”

차는 계속 달린다. 택시는 어느덧 캄캄한 도시의 외곽을 달리고 있다. 밖은 암흑이다. 주변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방향을 틀어 차를 세운다.

“타이어가 이상하네?”

남자가 중얼거리면서 운전석에서 내린다.

설희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어디였지?’

원우와 갔던 여름 강변을 찾을 수 없다. 찾아서 어쩌겠단 말인지, 생각하곤 곧 스스로 대답한다.
‘거기서 그날 봤던 밤하늘을 바라보는 거야. 반짝이는 별들과 아스라이 떨어진 별들, 그 뒤는 생각하지 말자. 천변에서 새벽을 밝히며 그를 머릿속에서 어떻게 지워야 할지, 생각해 보는 거야.’

변두리 공터에 차를 세웠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뒷문이 열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설희는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남자가 달려들었다. 좁은 택시 뒷좌석, 설희는 남자의 완력 따위 무섭지 않다. 결사적으로 버티는 이상 강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스총을 발사해서 기절 시켜놓지 않는 이상 어림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용기가 생겼다. 머릿속에서는 몸을 지켜야만 한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맹렬한 설희의 저항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남자는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그만하자, 후.”

남자가 숨을 돌리는 사이 설희는 잠깐 방심했고 남자의 손이 다시 머리채를 잡았다. 목이 졸렸다. 교복의 폭넓은 플레어스커트가 나팔꽃처럼 열렸다. 그때까지 남자 한 명에게 강간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자만심이 공포로 변했다. 설희는 발길질을 하고 남자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남자의 무릎이 설희의 배를 눌렀다. 설희는 두 손을 붙잡힌 채 발버둥 쳤다. 뾰족한 손가락이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설희는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러고도 필사적인 발차기는 계속되었다.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남자가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 위로 헝클어져 내린 머리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후, 네가 날 유혹하는 줄 알았어. 불량소녀인 줄 알고…….”

남자는 줄곧 미안하다는 말을 게워냈다. 설희보다 열세 살이 많은 서른두 살의 미혼 남자, 택시 다섯 대를 가진 차주였다. 자신의 꿈은 택시 백 대를 운영하는 거라며 남자가 가족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설희는 남자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남자가 잃어버린 신뢰감을 얻으려고 애쓰는 동안 설희는 승리감조차 느꼈다. 그러나 아랫도리에 불쾌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남자가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에 현실이 와락 달려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엄격하고 맹자 어머니 같은 분이야. 형이 하나 있어. 고등학교 수학교사야.”

‘흥, 맹자 어머니를 어디다 갖다 대는 거야.’

설희는 대꾸를 하려다 참았다. 남자는 자랑스러운 형에 관해 이야기 하다말고 푹 한숨을 쉬었다.

“난 고등학교 때 농땡이를 쳐서 대학에 못 갔어. 넌 대학 갈 거지?”

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적색 신호등에 걸리자 남자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고는 뒤로 돌아봤다.

“정말 미안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미쳤던가 봐. 네가 목적지도 안 밝히고 자꾸 가자니 갑자기 늑대로 변한 거지. 남자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짐승으로 변한단다. 네가 상황을 그리 만든 거라고. 나, 그리 나쁜 사람 아니야. 앞으로 보면 알 거야.”

설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발밑에 무릎을 꿇는 듯한 태도로 몇 번이나 잘못을 빌었다. 어찌나 비는지 비굴해 보이다가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다.

“그래그래,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이 하고 싶겠니. 미안해.”

남자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는데 양 볼에 보조개가 들어갔다. 꽃미남도 아니고 호남형도 아니다. 전형적인 나쁜 남자 외모, 퇴폐업소에 드나드는 쾌락주의자, 그런 느낌이 확 끼치는 인상이었다. 설희는 가방을 열었다. 학급비를 거둬놓은 봉투에서 돈을 꺼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설희는 버스정류장 앞에 차를 세운 남자에게 차비를 건넸다. 가슴이 쓰렸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폭행을 당하고도 공짜 차를 타는 불량소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남자는 또 사양하지 않고 돈을 받았다, 마치 저가 폭행한 대가의 화대를 받듯이. 가로등 불빛이 바르르 떨며 그들을 비추었다.

“이번 일요일 열 시에 여기로 나와. 안 나오면 영업 안 하고 택시를 종일 길에 세워놓고 기다릴 거야. 알았지? 꼭 나와.”

설희는 어른처럼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다. 긴 골목 안으로 걸어갔다. 개 한 마리 짖지 않는 고요한 밤길이었다. 손수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 모퉁이를 막 돌아 나오는 손수레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설희는 반사적으로 달려갔다.

“엄마!”

“뭐야! 이 늦은 시간에!”

“도서관 갔다가.”

“일찍 다녀라. 여자가 밤길 나다니면 사고 나기 십상이야.”

설희는 안 돼! 안 돼! 하는 엄마의 잠꼬대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에 덴 듯 아랫도리가 쓰라렸다. 어젯밤 일이 찬물로 얼굴을 끼얹듯 달려들었다. 내내 뒤척이다 창문을 보니 먼동이 트고 있었다. 설희는 변소로 달려갔다. 팬티에 선혈이 배어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가 팬티를 끌어 올렸다. 그제야 쌓인 똥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설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9회에 계속>



이지원 기자 / pine-post@hanmail.net입력 : 2018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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