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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상처에게 선물을 / 떨어지는 별 하나(10)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8년 05월 27일
10 떨어지는 별 하나


ⓒ GBN 경북방송



바람이 해변을 쓸고 지나가자 구름이 남은 해를 뚫고 거멓게 몰려왔다. 조금 후 구름은 동쪽으로 황망히 달아나고, 바다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선재는 개구쟁이 소년처럼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 위로 풀썩풀썩 뛰어다녔다. 무엇이 저렇게 좋을까? 설희는 입을 삐죽거리고, 눈을 흘겼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무의미한 환호성이었다. 설희는 치한이었던 남자를 따라 바다까지 온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푸른 물빛이 검게 변해 수평선은 높이 부풀어 올랐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설희는 생각에 잠겼다. 저 넘실대는 파도와 흩어지는 구름과 불타는 노을! 그런데 그것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것은 끼니를 거른 가난한 사람이 바라보는 그림 속의 떡과 같았다. 면도날로 그은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설희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아득한 수평선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외로워 보였다. 엄마 말처럼 인간은 외로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늘 떠나고 싶다는 엄마, 지금쯤 시내 행상을 마쳤겠지. 난전에서 목이 터져라, 호객하고 있겠지. 사과 사요, 사과! 파도에 휩쓸리며 엄마가 비틀거린다. 다음 순간 엄마는 몸의 중심을 잡고 파도를 타며 손뼉 친다. 달고 맛있는 사과! 짝짝짝. 엄마……. 설희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노을이 걷히며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 어두워지는 하늘에 정말로 하나님이 존재할까? 정말로 그분이 인간을 창조했을까? 그리고 나와, 저 남자의 죄를 용서하고 가엾게 여기실까. 설희는 하늘을 보고 물었다.

“웍!”

선재가 소리를 질러도 설희는 놀라지 않았다.

“바다까지 데려와 줬는데 왜 심술이 났어?”

설희는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차가 해안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릴 때까지 설희는 말없이 앞만 바라봤다. 흘끔흘끔 설희의 눈치를 살피던 선재가 휴게소에서 차를 세웠다. 트렁크를 열어 캔맥주를 꺼내 설희에게 건넸다.

“한잔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맥주는 처음이었다. 그것이 어떤 사태를 만들지 설희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술 마시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설희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맥주를 삼켰다. 처음 마시는 맥주가 시원하고 달았다.

“잘 마시네.”
“우마이!”
“무슨 말이야?”
“일어예요. 기막히게 맛있을 때는 ‘おいしい오이시이’가 아니고 ‘うまい우마이’라고 해요.
“멋지다는 뭐야?”
“すごい스고이.”

선재는 스고이네, 하며 손을 들어 설희와 하이파이브를 시도했으나 손을 내밀지 않자 민망해져서 들었던 팔을 내렸다. 설희는 그 순간 내 미래에 <스고이>를 외칠 날이 있을까,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우린 제 2외국어로 독어했거든. 아. 베. 체. 데.”

선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슈베르트의 <음악에 붙임>이었다.

―두 홀데 쿤스트 인비빌 크라운 앤 스툰덴……
Du holde Kunst, in wieviel grauen Stunden……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서글퍼져 어두울 때,
고운 가락 고요히 들으면
언제나 즐거운 마음 솟아나
내 방황하는 마음 사라진다.

독어를 배우지 않았지만 설희는 알고 있었다. 음악 교사가 슈베르트를 특히 좋아해서 원어로 가르쳤다. 설희는 선생의 실력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에 늘 아깝다고 했다. 하나님은 공평해서 재능을 주면 운을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인생의 맛은 まずい마즈이, 하기야 인생이란 것이 매일 맥주를 마시며 ‘우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매일 마시면 ‘마즈이’로 변하는 게 인간의 혀이고, 지독하게 맛없는 맛, 그게 인생의 참맛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니?”

“그냥요.”

맥주 캔을 반쯤 마셨을 때 설희는 알코올의 작용을 느낄 수 있었다. 알딸딸한 게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창문을 열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렸다. 계기판의 바늘이 제한 속도를 넘었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따라왔다. 선재가 차를 세우며 재빨리 말했다.

“경찰이 물으면 동생이라고 해.”
앳된 얼굴의 경찰이 면허증을 요구했다. 선재는 속도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학생, 괜찮아?”
경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 예, 하하, 동생입니다. 바다 구경시켜 달래서…….”
선재가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경찰의 시선이 설희 손에 들고 있는 반 남은 맥주 캔으로 이동했다.
“학생, 술 마셨어?”
“목마르대서 캔 하나 줬더니 처음 마시는 거라 해롱해롱 하네요. 하하. 뒤 트렁크에 있는데 좀 드릴까요?”
“됐습니다. 공무 중입니다.”
경찰의 눈가에 잡혔던 굳은 근육이 조금 풀렸다. 선재가 차 밖으로 나갔다. 트렁크를 열어 세우고는 눈을 찡긋,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캔 맥주 두 개와 마른오징어 한 마리를 꺼내 들고 경찰차를 향해 걸어갔다. 경찰차에 앉아 있던 나이 들어 보이는 또 한 명의 경찰이 손사래 쳤다. 선재는 스스럼없이 뒷좌석 문을 열고 캔 맥주와 오징어를 툭 던졌다. 선재가 차로 돌아오는 동안 젊은 경찰이 차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 동생 맞아?”

머리를 갸웃거리며 경찰이 물었다. 설희는 고개를 끄떡였다.

“음주 운전하면 안 됩니다.”

돌아와 옆에 서 있는 선재에게 경찰이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는 절대 음주 운전 같은 거 안 합니다. 보세요. 저는 안 마셨잖아요.”

선재가 입을 경찰의 얼굴 가까이 대자 경찰이 한 걸음 물러섰다.

“안녕히 가십시오.”

ⓒ GBN 경북방송


경찰이 오른손을 모자에 갖다 대고 거수경례를 했다.

“수고하십시오.”

선재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선재보다 경찰이 훨씬 어려 보였다. 경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설희는 목을 빼고 바라봤다. 키가 훤칠하고 등이 곧은 자세가 원우와 비슷한 체형이었다.

‘아…… 이 남자가 아닌 그와 함께라면…….’

설희는 무너져 내리듯 한숨을 쉬었다. 원우는 소식이 없다. 어디 먼 외국에라도 가버린 게다. 설희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웬 한숨이야?”

설희는 위로받고 싶었다. 손에 들고 있는 캔을 멍하니 보며 생각하는 중이었다.
‘아저씨니까, 나이가 열세 살이나 많으니까 이해해주겠지.’

“너, 고민 있지? 전에도 그렇더니만 말해 봐. 내가 도움 될지 아니?”

“남자에게 채었어요.”

설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뱉어냈다. 그동안 참아왔던 억눌린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눈물이라는 것은 감정을 과장하는 법이었다. 설희는 흑흑 흐느끼면서 원우에게 버려진 자신을 고백했다. 선재는 돌아오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형식적인 상담을 받고 나왔을 때처럼 설희는 후회가 되었다. 차가 성난 소처럼 도로를 갈팡질팡 달리고 있었다.

“잊어버릴 수는 없니?”

설희는 선재의 말이 유리창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 같았다.

“언젠가 잊겠죠. 하지만…… 모든 게 다…… 끝장나버렸어요.”

“끝장?”

선재는 말끝을 올리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곧 음악을 틀었다. 오래된 팝송이었지만 설희는 가사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살 이유가 없어졌어요.

설희는 자신을 위해 만든 노래 같아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훌쩍거리고 난 설희는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울지? 흥, 내게 살아갈 이유가 없다니! 가만 생각하니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엄마와 아버지, 할머니, 언니, 지예와 담임 선생님…… 난 이제 겨우 열아홉인데…… 입속으로 말했지만, 설희는 누군가에게 항의하듯 숙였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동시에 선재가 카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거칠게 눌렀다. 음악이 사라지고 무겁고도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설희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선재의 얼굴을 힐끗 봤다. 눈에서 무서운 광채가 흘러 나왔다. 그날 밤 느꼈던 야비하고 방탕한 치한의 모습이었다. 꼭 다문 입술과 일자로 뻗은 짙은 눈썹이 몹시 잔인해 보였다.

“그 남자를 정말 잊을 수 없다는 거지!”

선재의 말투가 조금 떨렸다. 설희는 선재가 감정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창 밖을 바라봤다.

“내가 잊게 해주지.”

선재가 난폭하게 핸들을 꺾어 차가 휘청거렸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난 차는 가까운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늘은 먹빛이었다. 어디쯤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시골길을 갈팡질팡 달렸다. 비포장도로 옆으로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을의 불빛이 멀리서 깜빡였다.

“내려!”


선재가 강도처럼 명령했다. 악마의 목소리였다. 선재의 마음에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설희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질투심이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가며 빠르게 울부짖었다. 선재에게 손목을 잡힌 설희는 꼬꾸라질 듯 끌려갔다. 검은 나무숲은 과수원이었다. 오솔길 바닥에 썩은 사과가 나뒹굴고 있었다. 선재가 설희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풀썩 넘어진 설희는 전처럼 남자가 무섭지 않았다. 다만 등 밑에 깔린 뭉그러진 사과가 터져 하얀 교복에 묻을 것을 걱정했다.

“잊을 수 없다면 내가 잊게 해 주마.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냥 보내줄 수가 없어!”

오늘은 버둥거리며 사력을 다해 몸을 지키려던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저항하던 설희의 몸이 힘없이 풀어졌다. 이미 원우에게 영혼을 빼앗겨버린 몸이었다. 자존심을 빼앗긴 허수아비 같은 몸뚱이에 혐오감이 일었다. 설희는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힘을 내서 이놈의 팔을 물어뜯어!’
‘기운이 없어.’
‘핑계대지 마. 너도 은근히 바라는 거잖아.’
‘내가 뭘.’
‘넌 원래 그런 애잖아. 원우에게도 가출했다고 거짓말해서 그걸 얻었잖아. 키스 말이야 교활하게.’
‘난 단지 그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원우 그 자식이 나쁜 놈이지. 딥 키스로 네 영혼을 빼앗아놓고 널 팽개쳤잖아.’
‘복수하고 싶어.’
‘그래, 복수해.’
설희는 복수의 달콤한 환상을 꿈꾸었다. 머리 긴 아가씨와 데이트를 간다며 싱글벙글 웃던 원우, 그리고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원우를 통쾌하게 걷어차고 싶었다.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선재의 폭력을 제어할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설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몰래 타오르고 있었던 조그마한 불씨가 선재라는 부싯깃에 옮겨붙기 직전이었다. 악마가 호기롭게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은 성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조용히 끓고 있었던 열아홉 육체의 동굴이었다.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컸다. 공포심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에둘러 말하지 말자. 설희는 성을 경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과 성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결핍되고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육체를 통해 보상받고 대리만족을 느끼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선재의 손에 몸을 맡기는 동안 첫 경험에 대한 상상과 몸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성에 대한 호기심이 처녀성을 잃는다는 두려움을 걷어냈다. 설희는 첫 경험이 그런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살이 찢겨나가고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듯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행이었다. 선재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동안 뾰족한 송곳이 칼질을 해댔다. 설희의 몸과 마음은 해체되고 있었다. 몸이 깊은 구덩이로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용암이 몸 안으로 맹렬하게 들어왔다. 단말마의 비명이 어둠 속을 찢어발기고, 그 소리가 설희의 귀에 메아리쳤다. 엄청난 양의 액체가 썰물처럼 몸에서 흘러나갔다. 설희는 차갑고 끈적끈적한 바다에 누운 채 한참을 떠내려갔다. 지나온 생의 가치 있던 것들과 아름답고 고결하던 감정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모든 것을 잃은 육체의 껍데기가 아득한 고독과 절망의 혼탁한 바다로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11회에 계속>






황재임 기자 / gbn.tv@hanmail.net입력 : 2018년 0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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